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 최문자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 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슴베는 칼이나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혀 있는 뾰족한 쇠붙이를 말한다.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처럼 자루 속에 숨어서 농기구를 지탱해 날이 잘 들게 해준다. 쇠붙이와 자루인 나무는 오행의 운행에서 금극목(金克木)으로 상극(相克)이라 한다. 낫은 나무를 쳐내고, 나무는 쇠붙이를 녹일 수 있어 상극이라는 것. 그런 상극관계인 쇠꼬챙이와 자루가 상생하여 온전한 낫이 되도록 해주는 역할이 슴베다. 조선낫 슴베도 물푸레나무로 된 자루 안에 숨어 있다. 나는 산소에 벌초를 할 때는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사용했던 조선낫을 쓴다. 그 슴베 덕분에 조선낫은 굵은 나뭇가지도 거침없이 쳐낼 수 있다. 슴베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야 제 기능을 한다. 그래서 시뻘겋게 달군 ..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물레 위 흙덩이에 온 마음이 놓였다. 미끄덩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에 흙덩이를 불끈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어터지듯 삐져나와 버리는 것이 아쉬워 남은 것을 그러모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시원하고 차진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흙을 잘 반죽해 떼어 놓은 덩어리를 ‘꼬박’이라고 부른다. 두드리고 비비고 매만지며 썰질 할 땐 무엇을 만들지 기분이 들뜬다. 조형토를 주물러 도톰한 사발이든 너른 접시든 얼추 형체가 드러날 땐 설렘도 커진다. 옆자리의 도공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를 잊은 듯 혼신의 기를 모아 자유자재로 형태를 넓혀간다. 꼬박은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꾸었던 건 ..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숭실대 국문과 졸업하고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시학』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과 요절 시인 열 명의 대표시를 모은 『요절 시선』 이 있다.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이 있음.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오리五里 / 우대식 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五里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 곳에서 다시 五里/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五里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
- Total
- 365,954
- Today
- 45
- Yesterday
- 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