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역사는 침묵 속에 살아 숨을 쉰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허리를 돌아서면 산수화 같은 마을이 펼쳐진다. 비슬산 자락에 물이 달을 품는 수월리(水月里)다. 깊디깊은 산골이라 실개천만 있을 뿐 작은 물웅덩이 하나 없어 도저히 달이 내려앉을 수 없는 촌락이었다. 마을 이름을 천 년을 내다보고 지었을까. 긴긴 세월 동안 조용하고 고요했던 이곳에 댐이 들어섰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 위로 달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수월리는 제 이름을 찾았다. 물과 달은 혼자 오지 않았다. 댐을 건설할 때 무려 삼천육백여 점의 유물이 땅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시대의 것도 아니요. 선사 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이서국(伊西國)이 남긴..

번역문 우리 백부와 곡운계곡으로 말하면 전후 십수 년 동안 일상의 기거에서 앉든 거닐든 구곡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첩첩 산곡과 울창한 초목이 모두 당신의 폐부며 모발이요, 안개와 구름이 모두 당신의 들숨이며 날숨이요, 물고기와 새와 고라니와 사슴이 모두 당신의 벗이니 무엇을 찾은들 얻지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종소문과 같은 화가를 빌어 그림을 그린 것은 어째서인가? 실로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발문을 쓴 뒤 선생이 읽어 보시고는, “네 말이 좋구나. 그러나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말이야. 내 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을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 구곡을 늘 눈길 속에 담아두지 못하잖아. 그럴 때에 이걸 보려는 게지.” 하셨다. 아,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좋아함이 독실하고 즐거움이 깊다고 하지 않으면 참..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진분홍 꽃 무리가 금방이라도 산언덕을 태울 듯 붉어지면 축제는 시작되었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오고 뽕할머니 제사 준비도 부산해졌다. 진달래꽃은 돌가자미라는 춤으로 쑥을 만나러 오고, 4월의 바다는 물을 벗기 시작했다. 서망마을 바당곳, 무당이 물에 빠진 넋을 건져 올리고 있다.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다 파도에 쓸려 멀어지고 무가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며 바닷속에 누운 넋을 달랜다. ‘어 이를 갈거나 어 이를 갈거나/ 이제 가면 못 오는 길 어서 바삐 가지 말고/ 불쌍하신 망자님 세 왕가고 극락 갈 제/ 천궁 없이 어이가리/ 잘 가시오’. 당골은 건져온 넋의 극락 천도를 기원한다. 낮은 대금 소리는 날카로운 피리 소리에 묻히고 가냘픈 해금 소리는..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은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

김정석 시인 전남 해남 출생. 2004년 『모던포엠』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빛 체인점』, 『내가 나를 노려보는 동안』 등이 있다. 광양제철 재직. 소화기 / 김정석 단 한 번의 불길을 위해/ 터지도록 제 몸에 압력을 채우고/ 사는 소화기, 당신// 또 헛방이다// 제대로 한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실금실금 빠져나가는 압력처럼// 이 웃음/ 이 세월/ 당신// 소화기 하나 들고 거기 벌서라/ 내가 불 지를 때까지// 전디다 / 김정석 '견디다'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데/ '전디다' 하면 가슴까지 뻐근해져서/ '전디다'라는 말이 좋다// 볼트와 너트가 입 앙 다물고 상대를 전디듯/ 바이러스가 어지럽힌 세월을 전디고/ 세월이 빠져나가는 나를 전디고// 당신을 전디고// 저물녘 당신 / 김정석 제철소에서/ 뻘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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