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어제의 아련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을 땐 살포시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는다는 건,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망각의 흉터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늦가을 만추에 고향집을 간만에 찾았다. 성글게 추억이 깃든 문간방 쪽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 눈을 살포시 감아본다. 찰나의 순간, 어제의 환영(幻影)들이 나를 뭉텅이로 데려가기 시작한다. 유년시절 나는 행랑채 서까래 기둥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마당 언저리를 두리번거리는 야릇한 버릇이 있었다. 마당 오른쪽 툭 튀어나온 둔덕에는 장독들이 정갈스레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아침이 되면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 사이로 간신히 헤치고 나와, 나지막한 흙 담장 위를 뛰어넘어 싸리나무 울타리 우듬지에 가뿐히 내려앉았다. 실낱같은 ..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삶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숨이 살아있는 시장으로 향한다. 느린 걸음으로 기웃거리다 보면 몸속에 엔돌핀이 샘솟고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실리며 덤으로 따뜻한 정까지 한 아름 안고 온다. 재래시장 난전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작은 바구니와 큰 바구니를 구분해 채소나 과일을 담아놓았다. 가격표는 골판지에 써서 바구니에 꽂아 한눈에 볼 수 있다. 모양은 삐뚜름하게 제멋에 사는 것처럼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가앉은 자연 그대로의 물상을 보고 있으니 더없이 친근하게 여겨진다. 인간 세상의 군상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설핏 웃음이 터진다. 물건을 담은 바구니의 크기에 따라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지난 5월 하순부터 내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걸음걸이가 약간씩 흔들리고,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곤하고, 갈증이 심하여 물통을 가지고 걸어야 했다. ‘금년에 처음 인생 80 고개 높은 문턱을 올라서는 순간의 설렘이겠지’ 하고 참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J 내과에서 심전도, 엑스레이 등 필요한 검사를 받은 결과 뚜렷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순환기 내과를 거쳐, 이비인후과 이동원 교수의 집도로 턱밑의 조약돌처럼 만져지던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다. 약 1년 전부터 턱밑에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 발견되었지만 아프지도 않고 생활에 지장도 없어 그냥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로 알았다. 한 주가 지나 수술 시 떼어낸 부분의 조직검사..
쓸쓸한 책상 / 강영환 책상이 젖어 있다/ 꽃병이 넘어져 물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흥건히 젖어 있다/ 누가 앉아 눈물을 흘리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책상이 눈물을 흘린 것일까/ 책상이 오래 전부터 가진 쓸쓸한 기분이/ 한꺼번에 울컥 쏟아져 책상은 젖어 있다/ 아이들은 꽃병에 꽃을 꽂지 않고/ 책상은 더 이상 소리내어 덤벙대지 않는다/ 책상에게 슬퍼하지 말라 일러도 소용없다/ 내가 가서 앉을 수 없는 책상은 더 이상 나의 것일 수 없다/ 배가 고픈 책상은 나의 경계 밖에서 쓸쓸하게 젖어 있다// 「녹토비전」 작품은 1984년 무크지 《지평 3》에 발표하였던 것을 보완하여, 1991년 시집 『쓸쓸한 책상』에 「아리랑 삼촌」으로 개제하여 실었다. 녹토비전 01 / 강영환 호랑이 발톱 가시나무가 둘러 쳐진 울안..
강영환 시인 1951년 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중의 꽃」으로 등단. 1979년 《현대문학》 시 추천완료(필명:강산청),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저서는 시집으로 『붉은 색들』, 『술과 함께』 『칼잠』,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쓸쓸한 책상』, 『이웃 속으로』, 『황인종의 시내버스』, 『눈물』, 『뒷강물』, 『푸른 짝사랑에 들다』, 『집을 버리다』, 『산복도로』, 『울 밖 낮은 기침소리』 등과 『현대시』, 씨디롬 『블랙커피』, 지리산 연작시집 『불무장등』, 『벽소령』, 『그리운 치밭목』이 있다. 시조집으로 『북창을 열고』, 『남해』, 『모자아래』 등과 산문집 『술을 만나고 싶다』가 있다. 이주홍 문학상, 부산작가상. 하동문학작품상,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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