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한 그림 앞에 섰다. 백발을 흩날리며 눈을 부릅뜬 늙은 여인의 그림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여자의 일생’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슴과 얼굴은 그녀의 살아온 자국처럼 온통 검버섯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그 무엇이 목줄을 타고 위로 올라오지만 입은 꽉 다물고 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그것은 다시 코로 올라가고 눈으로 갔다. 피눈물이 맺힌 눈과 흐르는 피를 막지 못하는 코가 대신 말을 한다. 그림은 여인의 자글자글한 주름의 세월만큼 참아 온 한을 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을 빌어 작가는 세상의 아픔을 얘기한다. 그 그림을 그린 김성룡. 나는 그를 미친놈이라 부른다. 십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반 미친 것처럼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그림을 우연히 보고 반년에 걸..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서기 1300년대에 나옹선사가 남긴 선시다. 선(禪)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이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 시대에 이 같은 선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선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작품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옹선사가 내가 태어난 영덕에서 나셨다는 그 사실 만으로 특별히 애착을 갖는다. 그야말로 무조건 좋아하는 편이다. 나옹선사(1320~1376)는 고려 말 예주부에서 출생했는데, 예주부는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다.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이기도 했다. 나옹왕사로 불리는 것..

장인수 시인 1968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하였다. 2003년도 시 전문지 《시인세계》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 , , , 등이 있고 교양서로 이 있다. 서울 중산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꽃 / 장인수 꽃은/ 조폭보다 더 조폭답다/ 전폭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예쁘다/ 불법 폐기물장에도/ 도로 건설 현장에도/ 여지없이 뿌리를 내리고 꽃은 핀다/ 꽃향기는/ 지독하게 살아남아/ 뿌리를 내린다/ 식물의 화려한 생식기인 꽃은/ 부끄럽지 않다/ 당당하고 용감하게/ 벌렁,/ 활짝/ 꽃잎을 한껏 벌린다/ 조폭보다 더 조폭 같다/ 포기마다/ 꽃폭이다/ 모든 서식지를 개척하며/ 모험심으로/ 미친 듯이/ 번식에 힘쓰며/ 살고, 살아내고, 살아간다/ 지독하고 징그럽다/ 꽃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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