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것을 혹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굳이 해 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안 되는 것을 했을 때의 묘한 후련함 같은 것, 그것은 일순간 삶의 긴장을 풀어버리면서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누군가 그 이유를 굳이 따져 묻는다면 아직 철없는 구석이 많기 때문이라 말하련다. 금기된 것을 깰 때의 기분, 어쩌면 그런 돌출성의 행동이 내 삶의 또 다른 자양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먹을 게 많았던 다락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 어머니가 내어오는 다락 속의 먹을거리를 맛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던 기억은 늘 새롭게 와 닿는다. 다락은 쉽게 오를 수 없는 공간이었기에 높은 위치만큼이나 호기심도 컸다. 내게 있어 다락방은 신화의 세계였다. 현실..
를 따라 삶과 문화의 족적을 좇아가는 프로그램을 본다. 야산에 흩어진 돌의 군락을 고인돌로 밝혀내고 민족과 문화의 이동을 풀어가는 내용이다. 돌 하나에 우주를 담고, 그 속에 암호 같은 흔적을 해석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내 감성도 비늘처럼 일어선다. 이성에 의해 질서화 되지 않는 감성으로 마음이 울렁거린다. 마치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곳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그럴 때 내게도 어떠한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 같다. 아니 대상의 형태를 자유롭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상상으로 정신의 절대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어 좋다. 돌의 원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의의, 그 속에는 체험이라는 시간이 있다. 먼 옛날 주검이 묻힌 곳이 오늘 비록 폐허가 되었을지라도 그 체험 속에 존재하는 원형은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어쩌면 ..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자주 종소리를 듣는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온 낯선 도시에서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비로소 내가 멀리 와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둠이 내리는 도시에 가뭇없이 밤이 깊어가고 휘황한 불빛들 사이로 길게 종이 울리면 분명 가슴 뛰는 은밀한 기쁨이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와 야간 투어를 위하여 도심 속을 걸을 때 어디선가 저녁 종소리가 들려온다. 댕 댕 댕~ 맑고 긴 여운의 소리가 해거름 하늘로 오르고 있다. 저물 어가는 저녁 햇빛 속에 공간을 울리는 종소리는 나의 여행의 시작을 알려주며 마음이 먼저 달뜨곤 했다. 종소리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도 자주 나온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성당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어린 소년이 ..
진은영 시인, 철학자 1970년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및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니체와 차이의 철학》이다.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등이 있으며, 철학 책 『들뢰즈와 문학-기계』,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코뮨주의 선언』,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있다.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 진은영 1/ 여자가 이사오던 날 밤/ 어둠은 글라이올러스처럼 피어났다/ 여자는 방에서 나와/ 마당 끝에 있는 창고로 걸어 들..
중국 항주에서였다. 시인 소동파와 한나라 광무제가 누렸던 흥취에 젖어보려고 서호에서 배를 탔다. 두 시간 동안 서호를 한 바퀴 돌면서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절경이었다. 서호를 월나라 미녀 서시西施에게 비유하여 날이 개이면 개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아름답다고 노래한 소동파의 시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 밤 일정은 송성가무 쇼를 보는 것이었다. 극장 문 위에 붙어 있던 편액의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給我一天 還你千年: 나에게 하루를 준다면, 당신에게 천 년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구경하고 천 년을 돌려받으면 횡재라고 생각하면서 왁자지껄한 객석에 앉았다. 공연 중에 천 년 전의 송나라 역사 사건이 등장했고, 편액의 뜻이 이 사건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여흥에..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창문 밖에는 낯선 은세계의 성지가 펼쳐져 있다. 순백색 융단이 지붕 위를 다붓이 덮었고, 목화송이 같은 눈꽃은 겨울나무에 매달렸다. 침엽수 위에 옷자락을 드리우고 신선처럼 길게 누운 모습이 여느 때 보다 초연하다. 아침 햇살 대신 눈이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방문에 흠칫 가슴이 싸해진다. 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서 가만히 눈 겨루기를 해본다. 넝쿨진 등나무 사이로 햇솜 같이 나부끼는 신비스런 눈발에 잠시 눈 멀미가 인다. 순결한 성자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무의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떨어지는 눈발이 켜켜이 나붓대어도 나무는 잔가지 하나 흔들림 없이 눈발을 맞이한다. 동(動)과 정(靜)의 엄숙한 만남에 마음이 찡해진다. 문득 십 년 전에 지..
손이 비트는 방향으로 노상 순하게 돌아가던 문고리였다. 내 의지대로 열리고 닫히던 문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문고리가 난데없이 저항했을 때, 마치 그것으로부터 격렬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의 완강한 저항, 나를 가로막는 단단한 저항이 손끝으로부터 온몸에 전해졌을 때, 내가 그동안 이 문을 장악하고 살았다 여겼던 게 실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문을 온전히 소유한 건 내가 아니라 열쇠였다. 일요일 오후, 여행 가방을 옆에 던져두고서 나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잠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다. 그는 외출 중이다. 집을 비우고 나간 그에게 수없이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이런 상황에 처한 데는 내 책임도 있다. 일정보다 일찍 서둘러 귀가한 책임, ..
박상순 시인, 문학출판 기획자 1962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를 졸업했다. 1991년 계간 《작가세계》 봄호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민음사에 1989년 입사해 대표이사(편집인)까지 지냈으며 출판 기획자로 백여 권에 이르는 국내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북 디자이너(book designer)로 문학, 인문학 책의 디자인도 했다. 그의 시는 전위적이고 낯선 느낌이 드는 시이다.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이 있다. 현대시동인상, 현대문학상,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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