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를 푼다. 오방색저고리에 물빛고운 본견치마 한 벌, 그리고 복숭앗빛 명주 두루마기 수의가 누런 담뱃잎에 싸여 있다. 행여 좀이 슬세라 세심하게 갈무리 한 탓일까. 견의 색과 광택도 그대로 살아있다. 마지막 가는 길 마음껏 호사를 누려보고 싶었던 어머니가 이승에서 손수 준비한 갈음옷이 화려하다. 영전사진속 어머니가 입은 무채색의 치마저고리. 그 색은 당신이 평생 좋아서 즐겨 입는 색인 줄만 알았다. 철철이 그 많은 남의 옷 지어주면서 고운 갈음옷 한 벌 해 입지 못했던 어머니. 나는 그때 어머니도 빛깔고운 옷 좋아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시집와서 쌀 서 말을 먹지 못하고 죽었다는 깡촌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낡은 손재봉틀 하나를 보물처럼 끼고 살았다. 어머니의 먼 인척이 이사가면서 물려준..
유월, 후덥지근한 날 저녁 무렵이다. 먹구름이 잔뜩 몰려드는 걸 보니 소나기라도 한줄기 퍼부어 댈 기세다. 그때다. 초인종을 누르는 후배의 표정이 날씨처럼 새초롬하다. 남편 옷을 사러 나갔다가 서로 얼굴만 붉히고 돌아왔단다. 그것이 원인이라니 다행이다 싶은 것은 부부가 함께하면서 칼로 물을 베기로 하듯 다투는 일이 한두 번인가. 나는 무심코 “본인이 가서 맘에 드는 옷을 사 입어라고 하면 되지 않냐”라고 했더니 그는 냉수를 벌컥거리며 들이킨다. 애연가인 남편이 담뱃불로 옷마다 구멍을 낸단다. 그때마다 옷을 사야 하니 속이 상했고, 한마디를 얻었더니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냐며 혼자 가버렸다는 것이다. 거기다 옷값조차 만만찮으니 잔뜩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
언니가 통영 특산물인 멸치를 보내왔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것이 맛있어 보여 얼른 가스 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청양고추와 호두를 넣고 멸치볶음을 만들었다. 또 멸치 우려낸 육수에 표고버섯을 갈아 넣고 우거짓국을 끓였더니 남편이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비워냈다. 쪼그만 멸치로 하여 행복한 저녁만찬이었다. 멸치 때문일까? 갑자기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엔 친한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제일 인기 있는 반찬은 단연 계란말이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에 콩장조림과 멸치볶음을 자주 싸주셨다. 철이 없던 나는 계란말이를 싸달라며 반찬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당시엔 멸치반찬도 어머니가 큰 맘 먹고 싸 주셨을 텐데……. 멸치는 작지만 대단한 녀석들이다. 한 마리일 때는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뚤뚤 ..
머릿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 쿵쿵쿵…. 그러다가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흐른다. 이어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잔잔한 멘트가 나온다. MRA 장비 안에서의 일이다. 검진 가기 전부터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까지 몇 번에 걸쳐 마음은 강물처럼 출렁거렸다. 지난 연말이었다. 앉았다가 일어서는데 갑자기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좀처럼 아프단 말 안 하는 양반이….”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정밀 검진한 지도 좀 됐으니 일단 검사 한번 해보자는 아들의 연락이 왔다. 자주 어지럼증을 느끼는 아내와 함께 가기로 했다. 검진 일정 잡혔다는 말에 오히려 덜컥 겁이 났다. 몇 년 전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혈관 조영제를 맞고 봄바람에 들불 번진 듯 온몸이 뜨거워져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이번 검사..
신지혜 시인 서울 출생으로 현재 미국 뉴욕에 활동 한다. 2000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되었고, 200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밑줄』(2007), 『토네이도』(2020)가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대상,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미주시인문학상, 미주문학상을 받았다. 국제계관시인협회 U.P.L.I, 미국시협회(P.S.A) 회원. 한국문인협회, 미동부한국문인협회, 재미시인협회 회원. 《시와뉴욕》 편집위원 역임, 뉴욕예술인협회 회장.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등 연재. 칼럼니스트로 활동 신지혜 시인의 다음 블로그입니다. 위 배너 그림을 클릭하시면, 신지혜 시인의 뉴욕시원 홈페이지, 로 자동 이동합니다. www.goodpoem.net 또는, 클릭! 시인 신지..
기둥시계가 언제 어떤 경위로 없어졌을까. 우리 형제들이 죽지에 힘 오른 새 둥지를 떠나 듯 다들 집을 떠나고 할머니도 세상을 뜨시고 대주이신 아버지가 풍을 맞으신, 유수 같은 세월의 어디쯤에서 시계는 멈추었으리라. 시간을 멈춘 시계는 얼마 동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벽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시계가 멈춰 선다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시계가 직무를 유기한 것이 아니고, 시계가 유기를 당한 것이다. 시계야 어차피 사람이 관리하는 문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계의 태엽이 다 풀린 상태를 할머니는 밥이 떨어졌다고 하셨다. 시계가 멎은 것은 밥이 떨어졌을 때뿐이었다. 시계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건 시계 불알소리를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뚝ㅡ닥, 뚝ㅡ닥’ 힘차..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엘리뇨’ 현상 때문일까, 아니면 참을성이 떨어진 내 체력 때문일까. 권태에 짓눌려서 무력하게 보낸 여름이었다. ‘애틀란타’의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이 일루의 희망이었다. 매일 텔레비전 앞에서 열대야를 지새우곤 했다. 금메달리스트의 눈물에 감동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나 대개 좌절의 어둔 표정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좌절하는 선수들의 아픈 마음을 동정하는 게 국민의 도리일 터이지만 경마장의 등외 마권자(馬券者)가 기대를 무산시킨 말을 원망하듯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원망했다. 그런 얕은 내 인간성이 불쾌해서 여름밤은 또 더 더웠다. 그들은 그 열전의 한순간을 위해서 4년간 올림픽 선수촌에 입촌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기량을 연마했을까.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의..
여름이 다 간 어느 날 동생들이 어머니를 뵈러 왔다. 어머니를 모시고 달빛이 교교한 베란다에 둘러앉아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그날 밤도 오늘밤처럼 달이 째지게 밝았다. 오랜만에 아버지가 읍내서 집에 돌아 오셨다.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시기가 미안하셨던 것일까, 웬 돼지다리를 하나 들고 오셨다. 앞다리인지 돼지다리가 작았다. 어머니와 우리 삼 남매가 툇마루의 철렁한 달빛 아래 삶은 돼지 다리가 담긴 함지박을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들고 오신 돼지다리를 삶아다 놓고 야행성 맹금류처럼 뜯어먹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뜯어 놓는 고기 첨을 삼 남매는 정신없이 주워 먹고 있었다. 그 때 안방에서 할머니가 담뱃대로 놋재떨이를 탕탕 치며 역정을 내셨다. 깜박 드신 잠이 우리들의 돼지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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