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을 연상케 하는 흑석, 그것은 한낱 돌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도무지 감정교류 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갑게 느껴져서 다가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아닌 것이, 남의 나라 국보가 된 막사발도 아닌 것이, 검은 유약을 발라 구워 놓은 듯, 도자기처럼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것은 어느 암흑시대에 구워진 흑자이다. 그 암흑시대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고 밤만 계속 되었을 것이다. 밤이 계속되는 하늘 아래서 구워진 흑자는 보이지 않는 암흑세계에서나 빛날 일이라며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개명천지에서는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옆의 다른 수석 쪽으로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려 발길을 멈추었다. 다시 눈길은 흑자 위에 머물렀다. 쏴아 바람을 일으키며 여인의 휘날리는 머릿결이 그..

봉숭아는 이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봉선화”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단아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러나 “봉숭아”하고 부르면 갈래머리 소녀가 달려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난 ‘봉숭아’라는 이름이 더 좋다. 봉숭아는 화려하지도 않고 꽃밭 한 가운데 서있지도 않는다. 장미처럼 정염을 사르며 화려함을 뽐내지도 않고, 해바라기처럼 크지도 않다. 그저 꽃밭 가장자리나 뒤편에 피어 있다가 자기를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만 다소곳이 눈인사를 보낸다.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온 몸에 가득 품어 안은 꽃이기도 하다. 동백처럼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지는 꽃.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는 꽃. 그 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뜨거운 태양을 제 안에 몰래 품는다. 수수한 촌부처럼 서있는 그 꽃이 정말 그렇게 뜨거운 것을 ..

심우기 시인 1964년 전북 함열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영미소설 전공). 2011년 《시문학》 등단. 시집 『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밀사』와 전자시집 『얼음 불기둥』, 영미번역시집 『그대여 내 사랑을 읽어다오』 외에 공저 다수가 있다. 함께하는 시인들 사무국장. 함시 동인. 실개울 / 심우기 너무 얕아 보여/ 내를 건너다, 그만/ 두 발목을 빠뜨리고 말았다// 울음 나무 / 심우기 울음으로 꽉 찬 나무는/ 산 겨울 땡땡 얼어/ 폭설 세차게 치고/ 고드름 속 헤집으려 해도/ 안을 열지 않는다// 한 올 실로 직조된 저마다의 슬픔은/ 서릿발 이파리를 내었다 거두고/ 꽃을 피웠다 꺼트린 모닥불처럼 금세 추워진다// 추우면 스스로의 비하와 열등감이 밀려든다/ 아무 소용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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