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친구가 동인동엘 가자고 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선뜻 앞장서 걸어갔다. 마침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슬금슬금 뒤따라가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얼핏 그의 뜻을 알아챘다. 어지럽던 시절, 때로는 술에 취해 때로는 누군가에게 쫓겨 젊음을 비비적거렸던 곳인데 여태껏 까맣게 잊고 지냈다. 괜스레 무슨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쭈뼛쭈뼛 녀석을 따라 동인동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터이지만 쌉싸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거리는 여전했다. 듬성듬성 늘어서 있던 찜갈비 식당들이 조금씩 개축되었을 뿐, 골목 어귀에서부터 풍기는 매콤한 마늘 냄새는 기억의 시곗바늘을 오래전으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실로 몇 년 만인가. ..
선이 보이지 않는 점의 연속이듯, 삶은 덤의 연속이다. 눈 뜨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밝은 하루, 역시 덤이다. 자궁에 착상도 해보지 못한 한날한시의 동료가 이미 수억에 이른다. 그뿐인가. 태중에서 유산이 되기도 하고, 호적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한 이가 부지기수이다. 고고의 성을 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제힘으로 '이어갈 힘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조물주가 혹은 하느님이 일단 '너 좀 와야겠어.' 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남겨둔 필생의 사업이 있다 할지라도 미련 없이 응해야 하는 것이 생명 가진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기억 이전의 사실이긴 하지만, 우선 이 세상에 오도록 점지 받은 것은 ㅡ 부모를 왕후장상으로 혹은 갑남을녀로 할 것인가. 그리고 아들로 혹은 딸로 태어날 것인가는 ..
김이듬 시인 196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부산대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 국문학 박사.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순천대·경상대 출강.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를 출간하였다. 김달진창원문학상, 시와세계작품상, 올해의좋은시상 수상. 꽃다발 / 김이듬 축하해/ 잘해봐/ 이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지 않을 때// 누군가 꽃다발을 묶을 때/ 천천히 풀 때/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 않을 때/ 그랬다 해도 내가 듣지 못할 때// 나는 길을 걸었다/ 철저히 보호되는 구역이었고 짐승들 다니라고 조성해놓은 길이었다// 겨울 휴관 / 김이듬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
가을이다. 가을은 바람으로 시작한다. 바람이 없는 가을은 멋과 운치가 없다. 바람은 낙엽을 떨어뜨려 이리저리 나뒹굴게 하지만 낙엽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가을엔 하나둘 비워야 하고 희생할 줄 알기에 새봄에 꽃을 달고 새잎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갈대의 계절이다. 갈대는 가을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갈대는 바람이 없으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바람과 갈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부지간이다. 바람이 남자라면 갈대는 여자이다. 바람이 불어야 갈대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바람이 갈대를 부르면 갈대는 가느다란 허리를 부스스 떨며 사정없이 제 몸을 흔들어댄다. 어느 가을날 충남 서천 신성리 갈대밭에 간 적이 있었다. 넓은 벌판에 끝없이 펼쳐진 갈대의 무리들이 춤을 추듯 일렁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
신부가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고 있다. “신도 여러분, 지옥에 가고 싶은 분 계셔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천당에 가고 싶은 분 계셔요?" 대부분의 신도들이 손을 든다. “아, 지옥에는 가기 싫고, 천당에 가고 싶은 분은 많네요." “그럼 지금 천당에 가고 싶은 분 계셔요?" 없다. 지금이란 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각이다. 지금이 좋다.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지금'이 좋다. 지금보다 더 나은 순간은 없다. 환하게 웃어주는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 창을 열면 흐릿하게 미소 짓는 부드러운 바람기가 있는 지금이 참 좋다. 흩어진 머리카락 쓸어 올리며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처럼 비틀거릴 하루지만 걸을 수 있는 고마운 두 다리가 있어 좋다. 땀방울 방울방울 이마에 맺혀도 열심히 살아가는 ..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는 약 1,700년 동안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뛰어넘어 한국 문화의 큰 축을 담당해 왔다. 그렇기에 과거 사찰이 운영되었던 사지(寺址)는 겉으로는 빈터처럼 보이지만 뛰어난 가치를 지닌 다양한 문화재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 예술혼도 함게 담긴 역사와 문화 부존자원 보고이다. 발굴유물로 확인한 『삼국유사』 속 이야기 사지(寺址)란 법등이 끊긴 사찰의 터를 의미한다. 석탑이나 석등, 사적비나 고승비, 승탑 등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지표면 아래 또는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 문화재 내부에는 사찰이 운영되던 당시 사용하던 수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미륵사는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사진 명소..
건강의 척도는 잘 먹고 잘 싸는 데 있다고 한다. 한데, 인생길 팔부능선에 오르고 보니 먹는 덴 예나 지금이나 별 이상이 없는데, 문제는 싸는 게 영 시원찮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양변기 타고 끙끙대다가, 황금덩이는 끝내 구경도 못한 채 엉거주춤 내려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뜰에 내려 옛날 습관대로 재래식 변소에 들어가 가까스로 근심 한 덩이를 풀고 나왔다. 해우소解憂所에 쪼그리고 앉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도습蹈襲 하노라면, 대장大腸이 압박을 받아 물리적 배변을 촉진 시켰다. 뿐만아니라 어릴 적 뒷간에 앉아 별자리를 짚었던 귀소본능의 향수에 젖어 거룩한(?) 작업을 이행할 수 있었다. 변비는 스트레스로 인한 대장 운동의 장애나, 위궤양으로 복벽근腹壁筋의 쇠약과 대장 ..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내가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가 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화장품은 성능과 가격 등 제품 특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꿈과 희망, 욕망까지 한데 뭉쳐진 아름다운 브랜딩의 꽃을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제품개발, 디자인, 모델 선발 등 다양한 회사의 안건이 있을 때마다 중년 아저씨인 나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장'이었다. 생각나면 곧장 실천해야 하는 성미였던 나는 당시 내 집무실에 손님을 위해 준비해뒀던 제품들을 꺼내 하나씩 발라보기 시작했다. 아내의 것 같기도 한, 어느 날엔가 마주쳤던 고운 처녀의 것 같기도 한 향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친김에 당시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던 머드팩도 듬뿍 발라보았다. 사용법을 몰랐던 나는 씻어내지 않고 서류를 보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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