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이 서는 날, 집을 나선다. 고무줄 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나서면 흙마당에 이는 바람처럼 푸석거리던 마음도 진득하게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닷새만에 한번 서는 오일장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여유와 인정이 있다. 자본의 힘이 시장구조를 장악한 도시의 시장에 비해 아직도 원시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즉한 장터로 들어서면 텃밭에서 키운 푸성귀 몇 단으로 전을 벌려 조무래기들의 과자 값이라도 마련하려는 할머니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이고 나물단처럼 모여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눈물겨운 가난도 봄볕이 될 수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이 든 농부 한 사람이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지폐를 침을 발라가며 세고 있는 철물점 앞을 지난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몇 버인가를 셈하..
지난 유월에 매실을 담가 두고 잊은 듯이 지냈다. 항아리 밑에 거무스름한 것이 고여 있어 손가락으로 찍어 보니 조청처럼 찐득하다.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실금이 나 있다. 아쉬움에 뚜껑을 열자 열여덟 아가씨처럼 탱글했던 매실은 수분이 빠져서 쪼글쪼글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볕이 좋아 베란다 한쪽에 둔 항아리 뚜껑을 열어 놓는다. 바람도 볕도 제한되어 있어, 마치 시골에서 평생을 지내다 기력이 쇠하여 어쩔 수 없이 도회지 자식들에게 얹혀사는 뒷방노인처럼 애잔하다. 창문을 연다. 가을볕은 성품 좋은 사람처럼 온화해서 좋다던 당신. 가을이면 으레 곱고 청명한 볕을 갈무리하고 싶어 했던 당신이시다. 긴 줄에 매달린 빨래가 만국기 되어 새물내를 휘날리는 날이면, 고추 쪄 널고, 고구마 줄거리 삶아 볕에 펼..
이화영 시인 △전북 군산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9년 《정신과표현》 등단(2009) △시집 『침향』,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침향(沈香) / 이화영 하롱베이를 다녀온 그가 팔찌를 내민다/ 촘촘히 몸 맞대고 있는 흑갈색 나무 구슬이 눈에 들어온다/ 상처의 진액으로 제 아픔을 동여매는 나무// 농라를 쓰고 하노이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한여름에도 차디찬 내 손끝을 생각한 마음이 애틋하다/ 희귀한 것들은 때로 모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휑한 손목에 팔찌를 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가 나를 휘감는다/ 섬뜩하다/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검은 윤기가/ 이따금씩 눈빛도 낯익다/ 수천 년 전 혹 나는 침향나무가 아니었을까/ 내 앞에 한줌 구슬..
암흑을 연상케 하는 흑석, 그것은 한낱 돌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도무지 감정교류 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갑게 느껴져서 다가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아닌 것이, 남의 나라 국보가 된 막사발도 아닌 것이, 검은 유약을 발라 구워 놓은 듯, 도자기처럼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것은 어느 암흑시대에 구워진 흑자이다. 그 암흑시대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고 밤만 계속 되었을 것이다. 밤이 계속되는 하늘 아래서 구워진 흑자는 보이지 않는 암흑세계에서나 빛날 일이라며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개명천지에서는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옆의 다른 수석 쪽으로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려 발길을 멈추었다. 다시 눈길은 흑자 위에 머물렀다. 쏴아 바람을 일으키며 여인의 휘날리는 머릿결이 그..
봉숭아는 이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봉선화”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단아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러나 “봉숭아”하고 부르면 갈래머리 소녀가 달려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난 ‘봉숭아’라는 이름이 더 좋다. 봉숭아는 화려하지도 않고 꽃밭 한 가운데 서있지도 않는다. 장미처럼 정염을 사르며 화려함을 뽐내지도 않고, 해바라기처럼 크지도 않다. 그저 꽃밭 가장자리나 뒤편에 피어 있다가 자기를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만 다소곳이 눈인사를 보낸다.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온 몸에 가득 품어 안은 꽃이기도 하다. 동백처럼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지는 꽃.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는 꽃. 그 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뜨거운 태양을 제 안에 몰래 품는다. 수수한 촌부처럼 서있는 그 꽃이 정말 그렇게 뜨거운 것을 ..
심우기 시인 1964년 전북 함열에서 태어났다. 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영미소설 전공). 2011년 《시문학》 등단. 시집 『검은 꽃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밀사』와 전자시집 『얼음 불기둥』, 영미번역시집 『그대여 내 사랑을 읽어다오』 외에 공저 다수가 있다. 함께하는 시인들 사무국장. 함시 동인. 실개울 / 심우기 너무 얕아 보여/ 내를 건너다, 그만/ 두 발목을 빠뜨리고 말았다// 울음 나무 / 심우기 울음으로 꽉 찬 나무는/ 산 겨울 땡땡 얼어/ 폭설 세차게 치고/ 고드름 속 헤집으려 해도/ 안을 열지 않는다// 한 올 실로 직조된 저마다의 슬픔은/ 서릿발 이파리를 내었다 거두고/ 꽃을 피웠다 꺼트린 모닥불처럼 금세 추워진다// 추우면 스스로의 비하와 열등감이 밀려든다/ 아무 소용 없..
언젠가 라디오에서 맨발로 다니는 부시맨 같은 원시부족들은 대지의 기운을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건강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맨발로 산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다. 등산화를 비닐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고 다녀야하는 등 번거로움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텔레비전에서 ‘발’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발이 ‘제 2의 심장’이니 ‘인체의 축소판’이니 경락이 어떻고 하는 말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33년째 신발만 연구한 전문가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근 신발의 진화는 맨발로 가려는 경향과 기능을 극대화하려는 경향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전자는 인간이 본래 맨발로 걸었을 때 발의 기능을 되살리려는 것이고, ..
쌍꺼풀 없는 작은 눈, 야무지게 꼭 다문 입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다소곳한 자세와 수수한 옷차림, 숨은 쉬고 있는 것일까? 내내 한 가지 톤을 유지하고 있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지인의 소개로 가게 된 첼로 독주회에서 나는 정작 첼리스트에게는 관심이 없고, 공연이 시작되면서부터 피아노 반주자 옆에서 악보 넘기는 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만 시선이 머문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놓칠세라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페이지 터너(page turner). 그녀가 하는 일의 정식 명칭이다. 악보를 넘긴다고 해서 넘순이, 넘돌이라고 쉽게 부르기도 한다. 독주곡의 경우에는 독주자가 악보를 완전히 외우기 때문에 악보 넘기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지만,..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