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익 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있음으로』가 있다. 미래의 책 / 주원익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이른 아침 뒷산에서 우는 뻐꾸기 울음이 마을에 가득하다. 소나기가 걷힌 뒤라서 물기를 머금은 울음소리가 싱그럽다. 해마다 듣는 소리지만 그놈의 울음을 듣고 있으면 까닭도 없이 수심에 잠겨, 화창하면 화창한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처량하기 그지없다. 봄이 깊어져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성화같이 울지는 않으나, 간간이 바람을 타는 먼데 소리가 심금을 더 울린다. 그 울음소리가, 야삼경(夜三更)에 우는 접동새만 못해도, 봄날 한나절 우는소리엔 애상(哀傷)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 강산 깊고 짧은 물줄기의 유역과 높고 낮은 산자락에서 우는 그놈의 울음은 청상(靑孀)의 한(恨)처럼 처량하다. 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정선 아리랑으로 뽑아내는 것 같기도 하고, 갈라진 산하의 시름을 우..
자연은 계절마다 새로운 소리를 연주한다. 이른 봄 살얼음이 낀 논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 봄의 창공을 나르며 노래하는 종다리, 여름향기를 뿜으며 노래하는 매미, 깊어가는 가을밤의 귀뚜라미 소리, 겨울 마당을 간질이는 싸락눈 내리는 소리… 쓸쓸… 아까부터 숲속 어딘가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쓰르라미 소리다. 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지금 숲을 가득 채우는 매미 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겠지. 이런 계절의 소리로 달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봄의 새소리, 여름의 풀벌레 소리, 가을의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 한겨울 한옥의 문풍지 소리까지. 계절마다 다른 소리로 달력을 만든다면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기분 좋은 하루가 열리지 않을까. 자연의 소리가 계절마다 다르듯 자연을 닮은 사람도 제 감정 따라 내는 소..
리산 시인 2006년 《시안》 신인상에 〈장미꽃 무늬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진단서〉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가 있다. '센티멘털 노동자동맹' 동인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 리산 어두워지는 행성의 저녁에서/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잔 차를 끓이고 있노라면// 밤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고// 한 세월 잊었던 꿈처럼// 지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며/ 불곰들 연어를 잡던 풀이 무성한 개울 생각// 있었지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밤새 찻물은 끓어오르고/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외로운 마음을 술에 의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고 나면 당돌해진다고나 할까요. 없던 용기도 생기더군요. “요즘도 가끔 혼술 하니?” 선배가 묻더군요. 복용하는 약이 있어 뜸하다고 했어요. 그날도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요. 단골인 나도 이름을 적고 자리가 나길 기다렸습니다. 우리 동네 아담한 초밥집입니다. 나는 혼자 술 마시는 것을 즐겼기에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지요. 추억이 그리운 날은 초밥집을 찾았고, 술 따라주는 친구가 필요할 때는 동태탕 집을 찾곤 했답니다. 종업원이 번호를 부르네요. 나는 바텐더 자리를 원했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주문을 받으러 내 옆으로 다가오네요. “따뜻하게, 차게, 어떻게 드릴까요?” “차갑게요.” 짧게 말하고 초밥 몇 점과 정종을 잔술로 주문했습니다...
‘식사하셨어요?’ 흔하게 쓰는 인사말 중 하나다. 그 물음에는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서민들의 한이 스며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누구는 소처럼 일하고, 어떤 사람은 강아지처럼 구걸했다. 몇몇은 눈밭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식사에 관한 인사말에는 너는 어떻게 한 끼를 무사히 해결했는지에 대한 걱정과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밥은 생존과 안부를 묻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밥’이라는 단음절을 사용하여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밥심으로 산다. 한솥밥 먹는다. 밥값은 해야지. 그 나물에 그 밥. 콩밥 먹고 싶어. 그 사람 밥맛이야.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다. 밥만 먹고 사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표정만으로 서로의 ..
김학중 시인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창세』가 있다.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 벽화 / 김학중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아내가 카페에 앉아있다. 학과 동기와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어학사전을 찬찬히 훑는다. 중요한 무엇을 찾는 중이다. 아무래도 문학적인 이름이 좋겠지. 백석 시詩에 나오는 갈매나무가 좋은데. 점잖은 드레.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은 어때. 알차고 잘 자란 소나무 찬솔도 있네. 아름다운 우리 사이를 예그리나라고 한다네. 고르고 골라 예비 후보로 몇 개의 단어를 저장한다. 유독 예그리나에 관심이 높았는데 알고 보니 짝퉁 우리말이다. 학습동아리에 어울리는 산뜻한 말은 없을까.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때를 초월할지도 모를만한 단어가 없을까. “있다! 사부작사부작” 아내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의 부사라고 설명한다. 아내는 이름을 정하기 위해 거듭 생각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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