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인가 그 여자는 나에게 자기의 유년시절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이야기했다. “화창하게 맑은 날 한낮 때쯤에 뒷산 앞산 소나무 숲속으로 낙엽을 긁으러 갔어요. 쇠갈퀴하고 멱서리를 가지고, 어른 나무꾼들을 따라서, 아마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의 늦은 가을이었을 거예요. 멱서리를 무덤 앞에 놓아두고 숲속에 들어가서 낙엽을 한 줌씩 긁어가지고 와서 멱서리에다 담곤 했어요. 낙엽이 멱서리 시울까지 차올라왔을 때 그것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낙엽을 담은 멱서리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끙끙 안간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왔어요. 우리 집 사립에 막 들어서니까는 어머니가 '아이고 내 새끼! 땔나무 많이 해오는 것 좀 보소! 하고는 그 멱서리를 받아들었어요. '아니, 무슨 놈 갈퀴나무 조금 담은 ..
한 겨울날 아침 일찍이 어머니는 김 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장엘 갔다. 중학생인 나를 앞세운 채 시오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김을 팔아 내 등록금을 주려는 것이었다. 하늘에는 시꺼먼 구름장들이 덮여 있었다. 금방 함박눈송이를 쏟아놓을 것 같았다. 장바닥에 김을 펼쳐놓았다. 가능하면 빨리 그것을 팔아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른 김은 눈비를 맞으면 망치게 되는 상품이었다. 어머니는 점심때가 가까웠을 때 한 상인에게 통사정을 하여 김을 넘겼다. 등록금과 차비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나서 어머니 주머니에 얼마쯤의 푼돈이 남았을까. 그 푼돈은 가용으로 써야 할 터이다. 이제 어머니와 나는 헤어져야 했다. 나는 장흥행 버스에 올라야 하고, 어머니는 고향 집으로 걸어서 가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점..
천서봉 시인 1971년 서울 삼청동 출생.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와 포토에세이 『있는 힘껏, 당신』이 있음. 이마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그리운 습격 / 천서봉 破片처럼 흩어지네, 사람들/ 한여름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박히네. 뚝뚝,/ 머리카락 끝에서 별이 떨어지네./ 흰 비둘기 신호탄처럼 날아오르면/ 지상엔 금새 팬 웅덩이 몇 개 징검다리를 만드네./ 철모도 없이, 사내 하나 용감하게 뛰어가네./ 대책 없는 市街戰 속엔 총알도 원두막도 그리운 敵도 없네./ 마음 골라 디딜 부드러운 폐허뿐이네.// 빵 냄새를 길어 올리던 저녁이/ 불빛 아래 무장해제 되네. 사람들,/ 거기 일렬의 문장처럼 서서 처형되네./ 교과서 깊이 접어 둔 계집애 하나 반듯하게 피었다/ 지면..
건너편 주상복합 아파트 상가에 간판이 오른다. 입주를 시작한 지 일 년여, 먹다 버린 옥수수처럼 드문드문 불 꺼진 빈 가게가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가 좋을 때는 서로 들어오려 경쟁을 했을 텐데 팬데믹은 창업의 수요마저 줄게 했다. 한해의 시간을 보냈으나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고 비어있던 상가에 간혹 새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또 하나의 간판을 달고 있다. 규격에 맞추어 돋아나는 얼굴은 몸단장을 마치고 데이트에 나가는 젊은이처럼 말끔하다. 새 옷을 입은 신입생처럼 기대와 설렘, 불안이 교차한다. 'SKY 영어학원'은 흰 바탕색에 진파랑 얼굴을 걸었다. 울울창창한 미래가 보장이라도 된 듯 간판은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대한민국의 세 개의 명문대학을 합친 sky, 푸른 하늘의 sky, 학원이란 글씨체는 하..
“가시는 내가 먹고, 장미는 그대에게”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P신부님께서 강론 중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어떻게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이 한마디로 가르쳐 준 것 같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라, 처음 본 것처럼 사랑하라.” 이 말씀도 강론 때 많이 말씀하셨기에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지난 화요일 문학반에서 만난 지인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뜻하지 않은 책 선물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책을 선물 받을 때는 다른 선물과 달리 주는 사람과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 마음은 고마운 것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책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영혼의 교감 같은 것이 흐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의 제자인 데이비드 케슬러가 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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