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의 창문 바로 앞이 조그마한 숲이다. 몇 종류의 나무가 있긴 하나 거의 아카시아다. 5월이 되면 창문은 탐스럽게 핀 아카시아를 잔뜩 그려놓은 액자로 착각할 정도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볼 때마다 쑥쑥 자라는 모양이 눈에 띈다. 하얗고 탐스러운 꽃들이 향기와 함께 창문으로 고개를 드려 민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꽃송이들이 점차로 사람 얼굴로 변한다.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어릴 때, 자주 놀러 다니던 산에서 보았던 그 아카시아인지도 모르겠다. 번식력이 강해 6·25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을 살리기 위하여, 아카시아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고 하니, 그 나무의 후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6.25 한국동란이 났을 때, 우리 가족은 동대문 옆의 창신동..
‘전주식당’이어서 전주에 있어야 하고 ‘서울식당’이어서 서울에 있는 건 아니다.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밥집이름이다. 세월이 비껴간 도심 속 달동네처럼 예나 지금이나 매양 같은 모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가끔 이런 밥집을 간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내 아련한 시간들이 머물러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움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허름한 식당 구석자리에 앉아 백반 한 상을 기다리는 잠시잠깐의 그 시간이 왠지 모르게 편안하다. 그 편안함이 내 안의 상념의 조각들을 불러낸다. 어머니가 차린 두레상. 두레상에 둘러앉은 가족들과의 기억들이 따뜻하다. 늘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 아침. 아궁이에 장작 타는 냄새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 무쇠솥에서 뿜어내는 흰 포물선은 하루의 시작을 ..
조용미 시인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등이 있다.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제19회 김준성문학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제24회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백모란 / 조용미 저 모란은 흰색과 붉은색의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저물녘 극락전 앞에 내가 나타났을 때 모란은 막 백색의 커다란 꽃잎을 겹겹이 닫고 있었다/ 학의 날개 같은 꽃잎 안에 촘촘한 노란 수술을 품고 노란색 수술은 무시무시하게 붉은 암술..
오랜만에 어머님이 사시던 집에 왔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만 집은 주인이 있는 양 온전하다. 나름 견고하게 지은 집이라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온기가 가신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기둥은 예나 다름없이 기개를 펴고 있다. 마루 역시 세월의 흐름을 표면의 얼룩진 자국들로 감추진 못해도 저만큼에 앉아 계시던 어머님의 정취를 한껏 풍기고 있다. “이 마루 우리 집으로 옮기면 좋겠다.” 네모만을 고집하는 요즘의 아파트가 싫어 남편은 주택을 선호한다. 나 역시도 아파트의 폐쇄된 공간이 마땅찮아서 남편의 생각에 적극 동의한다. 다행이 여유로운 집터에 산 지 오래 되어 좁은 공간에 들면 답답함을 밀어내기가 그리 녹녹하지 않다. 문득 거실 앞에 툇마루라도 놓고 싶은 욕심이 일어 남편에게 의견을 내놓았..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지난해 멧돼지가 들이받아 나무둥치가 찢긴 채 땅에 누워버렸던 나무다. 그렇게 상처를 입었던 나무가 올봄 꽃을 소담하게 피워냈다. 콩알만 한 복숭아가 맺혔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움켜잡고 있었다는 것이 신비스러움을 지나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뭔가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수행자 같다.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그만도 못한 자신이 더없이 부끄럽고 마음의 회한으로 남는다. 오랫동안 가꾸어 온 농장이 너무 방대한 탓에 관리가 소홀해졌다. 야산을 개간해서 만들었던 농장이 그동안 나무와 숲이 우겨져서 다시 야산으로 변해간다. 이제는 다시 날고 기는 짐승들의 터전이 되어버렸다. 농장에 심어진 복숭아는 익을만하면 멧돼지가 주인이었고, 맛이 든 감은 새들이 먼..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경주 문예대학,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물소리를 쬐다』가 있다.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시in’ ‘응시’ 동인. 선물 /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 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
벼가 치자 빛으로 물들어 간다. 들녘의 메밀꽃은 하얗게 솜사탕을 풀어내고 소슬한 바람이 차창 가로 스친다. 긴 세월 얽매인 직장의 매듭이 풀리자마자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 말에 “이왕이면 홀로 계신 시이모님 두 분도 같이 모시고 가요.” 하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어머니가 더 좋아하겠네.” 하며 소년처럼 들떠서 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 들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어머니는 이모들과 전화만 할 뿐 만나지 못해 답답하다고 넌지시 푸념을 했다. 폐를 갉아먹는 병마에 지쳐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랑잎 같은 시어머니. 잠시나마 파리한 그 얼굴에 웃음 띠게 할 수 있다면 맘의 부담쯤이야…. 앞에 앉은 세 여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끝없이 말 꾸러미를 풀어낸다. 모처럼 만났으니 못다 ..
어스름 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서산마루에 걸렸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계곡 물에 세수하였다. 청아한 기운이 가슴까지 흘러내린다. 밤안개에 묻어온 운해는 산봉우리를 가리며 하늘과 경계를 지운다. 검푸른 능선 자락이 점점 뚜렷이 다가온다. 태양이 대지를 정복하기 전에 계곡 탐사 길에 나섰다. 어제 지리산에 텐트를 펼쳐 집 한 칸 뚝딱 지었다. 해거름에 근처 골짜기로 내려가 여울물에 발을 담그니 한낮의 더위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넓적 돌에 앉아 윤슬로 일렁이는 물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산굽이를 따라 이어진 계곡 물의 끄트머리는 어디쯤일까. 시선이 미치는 골짜기 언저리는 산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지난밤 산책하러 숲길을 나섰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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