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 독일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가 있다.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손 없는 날 / 김경후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
봄기운 완연한 수밭 고개로의 아침 산책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인적이 드물어 해찰하며 걷노라면 온전히 내 세상이다. 문득 길가 나뭇잎에 잔뜩 붙은 송충이 떼가 눈에 들어온다. 몸통의 송송한 가시털을 보니 스멀스멀 소름이 돋는다. 보드라운 잎사귀가 태반이나 뜯겨 잎맥만 앙상하다. 푸르른 녹음의 절정을 누리기도 전에 비명횡사 지경이다. 징그러운 송충이에 대한 불쾌감과 새잎에 대한 연민이 나를 충동질한다. 송충이가 붙은 가지를 통째 꺾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것들을 밟아 문지르려는데 한 마리가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다. 네가 뭔데 우리를 이리 핍박하느냐고 항의하는 듯하다. 문득 한 생각에 발을 거둔다. 먹이사슬의 상위 계보인 조류의 식량을 수탈하는 행위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개입은 여기까지, 힘이 ..
이월에 끝자락에 서면 봄소식이 기다려진다. 제주에는 유채꽃이 가장 먼저 봄을 전한다. 반도 남쪽의 매화나무는 섬진강의 삼동(三冬)칼바람을 몸으로 지켜, 가지마다 따뜻한 온기가 돈다. 물오른 가지는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 긴 어둠과 추위를 견디어온 기다림의 신비가 하나씩 그 속에서 싹트고 있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봉오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는 듯, 봄의 메시지를 전한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비가 자주 온다.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지만 봄바람은 세차게 불면 내 가슴도 미어진다. 가지마다 봄맞이를 준비하던 과실수는 계속되는 냉해로 움츠린다. 피어오르려는 꽃망울마다 얼음 덩어리를 뒤집어쓰고 겨울잠으로 되돌아간다. 봄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이지만 벚나무는 묵묵히 말이 없다. 가지마다 보랏빛으로 변..
김민정 시인, 출판인, 문학편집자 1976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가 있으며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 제8회 박인환문학상, 제17회 현대시작품상, 2018년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하였다. 랜덤하우스코리아 편집장 역임, 문학전문출판사 '난다'의 대표.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가 다리 두 ..
아모르파티! KBS에서 탱고풍의 가수 김연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중가요에 이런 깊은 뜻의 철학적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처음 들었을 때는 ‘아모르’ 파티party인가 했다. 신나는 파티 즉 향연 같은 것인가. 다시 자세히 들어보니 ‘아모르 빠띠’이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 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나는 아모르파티Amor Fati란 말을 좋아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 희랍어에서 온 말이다. 아모르는 에로스Eros를 의미하고, 파티Fati는 운명을 뜻한다. 종합해 보면 아모르파티는 운명애運命愛라 해석할 수 있다. ‘운명을 사랑하..
비가 내린다. 컴퓨터 음악 사이트에 들어가 슬픈 가요를 켜놓고 벌렁 눕는다. 마치 세상의 슬픈 연인이 나이고 세상의 모든 이별이 나의 것인 양 슬프다. 왜 노래 가사 속의 사랑은 꿈을 꾸듯 허무하다고 하고 잔인하다고 할까. 미련 남은 사랑도 미운 사람도 그다지 없는데 노래를 들으면 미운 사람도, 보내야 할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그래도 이런 가사가 싫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울렁거릴 나이가 아니라 다듬어야 할 나이이다. 내 노래 창고에는 언제나 파란 기억이 살아있다. 천상에 계시는 부모님도 있고 나를 아껴준 지인도 있고 내 마음 같은 철학도 있다.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에게 노래가사처럼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으..
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 -성삼문(成三問) 신주 봉안 논쟁- 번역문 또 아뢰기를, “홍주(洪州) 노은서원(魯恩書院)의 유생인 유학 최건(崔謇) 등의 상언(上言)에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사판(祠版)은 그 부인이 직접 쓴 필적인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다행히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만 제(題)한 방법이 또 예식(禮式)과 달라 가묘(家廟)에서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차마 다시 묻을 수도 없어 그대로 노은서원의 위판(位版) 뒤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있고, 선현이 의기(義起)하여 깊은 뜻을 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대신 제사를 지내는 자손이 모시고 갈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선현이 이미 정한 의론에 크게 위배되는 ..
박은영 시인 197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동아인재대학교 졸업. 2018년 《문화일보》,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시집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우리의 피는 얇아서』가 있다.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제2회 제주4.3문학상. 제2회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제9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상. 품시 동인 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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