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과 원문 이롭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 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 된다. 不可以利躁進 不可以危勇退 불가이리조진 불가이위용퇴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권18 해설 요즘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흠결이 있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그동안의 명성에 먹칠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고 민낯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아지니 사회가 점점 퇴보하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처신(處身)하는 데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중요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두고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강혜빈 시인 1993년 성남 출생.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밤의 팔레트』가 있다. 사진가 ‘파란피(paranpee)’로 활동 중이다. 나, 마사코는 생각합니다 / 강혜빈 추운 날에는 추워서/ 더운 날에는 더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은아이의 방 안에는/ 큰아이의 옷이 널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네 번째 발가락이 없었는데/ 자꾸만 왼쪽으로 굽어지는 골목// 맏딸은 감나무에서 떨어져도 맏딸입니다// 문지방 위에 앉아 미신을 생각하는/ 발톱을 깎으며 쪼그라드는/ 자매들이 있었는데// 나, 마사코는 대답합니다// 더운 날에는 덥게 태어나서/ 추운 날에는 춥게 태어나서/ 쓸모를 몰랐기 때문이에요// 큰아이의 ..
한 여인이 펼쳐진 억새밭에서 춤을 춘다. 느릿느릿 일정한 형태도 없이 흐느적거린다. 마치 내면의 슬픔을 끌어내듯 춤이 진행된다. 그녀의 의식에 따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다 눕는다. 영화 의 시작 장면이다. 친정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의 매운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가벼운 주머니도 말없이 받아냈다. 구성지게 뽑아대는 판소리 여섯 마당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주막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한나절 내내 약장수와 어울려 다니다 분 냄새 풍기고 들어와도 모른척했다.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가족에게는 불같았던 아버지와 달리, 훅 불면 날아갈 듯 한 가랑잎 같은 엄마가 가정을 지키는 것은 사막의 낙타처럼 감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어려..
봄은 새 옷 짓고 찬연하다. 연둣빛 생명들은 언어도 익히기 전에 들판으로 달려 나가 잎보다 먼저 꽃이 폭발한다고 소문을 냈다. 언 땅 뚫고 올라온 할미꽃이 둥글게 말린 허리를 편다. 한줌 햇살 머리에이고 언덕바지에 숨고르기 하려는 참인데, 바람이 분다. 굽은 허리 부러질라 납작 구푸린 머리가 흙속에 다시 묻힐까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힘을 세게 줄수록 붉어지는 얼굴은 비단 꽃을 피웠다. 봄의 축제로 드높은 하늘에 풍선을 띄웠지만, 느닷없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있다. 원인불명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세상 센 바람이 분다. 주눅이든 생각들은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걸려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들이 휴지조각으로 너풀대고. 고통으로 배여든 도시는 절규로 나뒹굴며 거리를 방황하던 슬픔들은 까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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