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치자 빛으로 물들어 간다. 들녘의 메밀꽃은 하얗게 솜사탕을 풀어내고 소슬한 바람이 차창 가로 스친다. 긴 세월 얽매인 직장의 매듭이 풀리자마자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 말에 “이왕이면 홀로 계신 시이모님 두 분도 같이 모시고 가요.” 하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어머니가 더 좋아하겠네.” 하며 소년처럼 들떠서 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 들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어머니는 이모들과 전화만 할 뿐 만나지 못해 답답하다고 넌지시 푸념을 했다. 폐를 갉아먹는 병마에 지쳐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랑잎 같은 시어머니. 잠시나마 파리한 그 얼굴에 웃음 띠게 할 수 있다면 맘의 부담쯤이야…. 앞에 앉은 세 여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끝없이 말 꾸러미를 풀어낸다. 모처럼 만났으니 못다 ..
어스름 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서산마루에 걸렸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계곡 물에 세수하였다. 청아한 기운이 가슴까지 흘러내린다. 밤안개에 묻어온 운해는 산봉우리를 가리며 하늘과 경계를 지운다. 검푸른 능선 자락이 점점 뚜렷이 다가온다. 태양이 대지를 정복하기 전에 계곡 탐사 길에 나섰다. 어제 지리산에 텐트를 펼쳐 집 한 칸 뚝딱 지었다. 해거름에 근처 골짜기로 내려가 여울물에 발을 담그니 한낮의 더위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넓적 돌에 앉아 윤슬로 일렁이는 물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산굽이를 따라 이어진 계곡 물의 끄트머리는 어디쯤일까. 시선이 미치는 골짜기 언저리는 산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지난밤 산책하러 숲길을 나섰으나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
봄기운 완연한 수밭 고개로의 아침 산책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인적이 드물어 해찰하며 걷노라면 온전히 내 세상이다. 문득 길가 나뭇잎에 잔뜩 붙은 송충이 떼가 눈에 들어온다. 몸통의 송송한 가시털을 보니 스멀스멀 소름이 돋는다. 보드라운 잎사귀가 태반이나 뜯겨 잎맥만 앙상하다. 푸르른 녹음의 절정을 누리기도 전에 비명횡사 지경이다. 징그러운 송충이에 대한 불쾌감과 새잎에 대한 연민이 나를 충동질한다. 송충이가 붙은 가지를 통째 꺾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그것들을 밟아 문지르려는데 한 마리가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든다. 네가 뭔데 우리를 이리 핍박하느냐고 항의하는 듯하다. 문득 한 생각에 발을 거둔다. 먹이사슬의 상위 계보인 조류의 식량을 수탈하는 행위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개입은 여기까지, 힘이 ..
이월에 끝자락에 서면 봄소식이 기다려진다. 제주에는 유채꽃이 가장 먼저 봄을 전한다. 반도 남쪽의 매화나무는 섬진강의 삼동(三冬)칼바람을 몸으로 지켜, 가지마다 따뜻한 온기가 돈다. 물오른 가지는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 긴 어둠과 추위를 견디어온 기다림의 신비가 하나씩 그 속에서 싹트고 있다.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봉오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는 듯, 봄의 메시지를 전한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비가 자주 온다.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지만 봄바람은 세차게 불면 내 가슴도 미어진다. 가지마다 봄맞이를 준비하던 과실수는 계속되는 냉해로 움츠린다. 피어오르려는 꽃망울마다 얼음 덩어리를 뒤집어쓰고 겨울잠으로 되돌아간다. 봄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이지만 벚나무는 묵묵히 말이 없다. 가지마다 보랏빛으로 변..
아모르파티! KBS에서 탱고풍의 가수 김연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중가요에 이런 깊은 뜻의 철학적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처음 들었을 때는 ‘아모르’ 파티party인가 했다. 신나는 파티 즉 향연 같은 것인가. 다시 자세히 들어보니 ‘아모르 빠띠’이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 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나는 아모르파티Amor Fati란 말을 좋아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 희랍어에서 온 말이다. 아모르는 에로스Eros를 의미하고, 파티Fati는 운명을 뜻한다. 종합해 보면 아모르파티는 운명애運命愛라 해석할 수 있다. ‘운명을 사랑하..
비가 내린다. 컴퓨터 음악 사이트에 들어가 슬픈 가요를 켜놓고 벌렁 눕는다. 마치 세상의 슬픈 연인이 나이고 세상의 모든 이별이 나의 것인 양 슬프다. 왜 노래 가사 속의 사랑은 꿈을 꾸듯 허무하다고 하고 잔인하다고 할까. 미련 남은 사랑도 미운 사람도 그다지 없는데 노래를 들으면 미운 사람도, 보내야 할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그래도 이런 가사가 싫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울렁거릴 나이가 아니라 다듬어야 할 나이이다. 내 노래 창고에는 언제나 파란 기억이 살아있다. 천상에 계시는 부모님도 있고 나를 아껴준 지인도 있고 내 마음 같은 철학도 있다.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에게 노래가사처럼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으..
느닷없이 사진 하나가 카톡에 올라왔다. 앙상한 고춧대가 어설프게 얹혀 있는 낡은 지게였다. 수확이 끝난 황량한 밭 가운데 목발을 내려놓고 가늘고 긴 지겟작대기에 몸을 의지한 채 홀로 서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사진 속의 지게가 유년 시절을 불러온다. 입대를 앞둔 작은형님이 말했다. 내일은 도시락을 준비해 나무하러 간다고. 동생들만 남겨두고 가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매사에 욕심을 냈다. 토담이 있던 자리에는 시멘트 불록으로 담장을 쌓고 비가 많이 와도 문제없도록 장독대도 손질했다. 매년 방학만 되면 가래톳이 생기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산을 오르내렸지만, 점심을 준비해간 적은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궁금한 점이 많아도 형님의 결정을 그냥 따랐다. 그날은 밤새 바람이 매섭게 불었..
팬미팅 입장표 예매가 시작되니 희비의 쌍곡선에 불이 붙었다. 성공한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라며 희희낙락이다. 실패한 사람은 망연자실하여 티켓팅이 아니라 피켓팅이라며 풀썩 주저앉는다. 표를 구해 볼 엄두가 안 난다며 남편이 가족 채팅방에 메시지를 올린다. ‘어느 집 자식은 노부모를 위해 불로초도 구해준다더라. 입장권 두 장만 구해내라. 엄마 등살에 목숨이 위태하다’라고 하소연하니 아들이 나선다. 마산역을 출발해 서울 강서구 아레나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니 보라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아리스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작은 가게는 잔치에 초대된 식구들 웃음으로 꽉 찬다. 내가 푹 빠진 팬카페 이름은 트바로티, 가수 K는 별님, 팬덤명은 아리스다. 서로 간에는 식구라 칭하며 응원봉 이름은 그대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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