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 김태길 “너는 숫기가 없어서 탈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면서 컸다. 사내자식이 숫기가 없으니 아무짝에도 못쓰겠다고 아버지는 걱정을 하셨다. ‘숫기’가 무엇인지 잘을 몰랐지만, 죄우간 남자에게는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나에겐 없는 모양이었다. 남의 시선과 정면에서 마주친다는 것은 늘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시골의 가난한 어린이들은 그것도 놀이라고 ‘눈目싸움’이라는 것을 자주했거니와, 나에게는 그 도전이 은근히 걱정스러운 위협이었다. 남자의 시선보다도 여자의 시선은 더 부담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당하가 어려운 것은 예쁘고 동백기름 냄새 그윽한 누나들의 시선이었다. 무섭지는 않은데 공연히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남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던 한심한 버릇은 나이가 든 뒤에..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 김태길 버스 안은 붐비지 않았다. 손님들은 모두 앉을 자리를 얻었고, 안내양만이 홀로 서서 반은 졸고 있었다.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 어린이 하나가 그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버스는 급정거를 했고, 제복에 싸인 안내양의 몸뚱이가 던져진 물건처럼 앞으로 쏠렸다. 찰나에 운전기사의 굵직한 바른팔이 번개처럼 수평으로 쭉 뻗었고, 안내양의 가는 허리가 그 팔에 걸려 상체만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녀의 안면이 버스 앞면 유리에 살짝 부딪치며, 입술 모양 그대로 분홍색 연지가 유리 위에 예쁜 자국을 남겼다. 마치 입술로 도장을 찍은 듯이 선명한 자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전기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그의 듬직한 ..
점심식사를 함께 한 세 사람이 들어간 다방은 한산하였다. 음악도 쉬고 있었다. 별다른 용건이 없었기에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는 가운데, 화제가 재주 있는 사람들 이야기로 비약하였다. 화제를 그리로 옮긴 것은 그 자신이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인 가선생이었다. 백낙준 선생과 유진오 선생 같은 장수하신 명사들의 증언을 언급해 가며, 가선생은 춘원의 재주를 말하고 또 육당의 박식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밖의 여러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 화제에 올랐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생존해 있는 우리 주변의 인물들 가운데서 재주로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도 등장하였다. 초인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활기에 가득 차게 마련이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옛날 장사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일곱 가지..
버트런드 러셀은 언제나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어린이보다는 가끔 말썽을 부리는 어린이가 도리어 장래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특히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근성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더러는 권위에 도전하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전통 윤리에 따르면, 웃어른에게 항거하는 언행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다. 특히 부모나 스승에 대해서는 무조건 순종을 해야 하며, 그래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는 말이 칭찬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세상 풍조가 크게 달라져서 자녀가 부모의 뜻을 어기거나 학생이 선생에게 반항하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도 점차 민주주의 방향으로 변화해 가는 가운데, 젊은이들의 기개도 높아졌다고 보는 해석이 일단 성립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인간은 누구나 어떤 목적을 세우고 살게 마련이라고 전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복'이라는 말을 좁게 이해하여 어려움이 없이 안락한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에 일생을 바친 의사(義士)나 죽음을 무릅쓰고 험준한 고산에 도전하는 산악인의 목적은 안락한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말을 넓게 해석하여 인간으로서의 깊은 만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삶을 갖는 일이다. 인간으로서의 깊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인간다운 삶'이라는 말..
한국산 자동차가 캐나다와 미국 등 외국에서 잘 팔리는 이유의 하나는 그곳으로 이민간 교포들이 솔선하여 국산차를 사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한국산 자동차의 판매소가 없는 미국 어느 시골에 사는 교포는 포니 차를 구하기 위하여 수천 리 먼길을 달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역만리 해외에서 한국산 자동차를 몰고 달릴 때 우리 교포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환희와 긍지를 느낀다. 그만큼 우리 한국인은 겨레와 나라에 대한 향념이 강한 것이다. 국제 운동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는 우리 한국인의 나라 사랑을 피부로 느낀다. 어느 나라 국민인들 제 나라 선수들에 대하여 뜨거운 응원을 보내지 않을까만, 우리 한국인의 응원은 보통 이상으로 열기에 넘친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박수를 치며 목청을 높일 때, 온 국민은 글자 그대로 ..
단둘이 마주 앉아 비밀에 가까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에 대해서 나는 깊은 정을 느낀다. 친구로 믿기에 그런 이야기까지 숨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마움에 젖은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알려서는 안 될 소중한 이야기 같아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묵묵히 미소만 지으며 말이 없는 친구도 좋지만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친구도 싫지 않다. 다만 그 말끝마다 가시가 돋힌 이야기는 신경을 괴롭히며 은근히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이야기에는 흥미가 적다. 가시가 돋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내려치는 풍자일 경우에는 속이 시원하다. 비록 자기 자랑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도 몰랐던 성공담을 처음 들려줄 경우에는 더없이 기쁘다. 그러나 아무..
어떤 기업체 여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직업이라는 것이 쉽게 말해서 무엇입니까?" 망설이는 듯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기에 가장 가까운 자리의 아가씨에게 말을 시켰더니, "삶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직업의 가장 큰 뜻이 돈벌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아가씨 이외에도 많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직업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돈의 힘이 압도적인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직업의 큰 뜻이 돈벌이에 있다고 보는 까닭에 사람들은 돈의 손짓을 따라서 좌우로 흔들린다.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방법도 사양하지 않고, 돈만 더 준다면 미련 없이 새로운 직장을..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