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3157

호미 / 강돈묵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뿐이다. 옆 친구의 큰 키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중책을 꿈꾸지 않는다. 허접스러운 일만이 자신의 몫이라 해서 투덜거리거나 원망하는 법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주 미천하다는 것을 알기에 늘 자족하며 살아간다. 그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담금질 속에서 태어났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화덕 속에서 견딜 때는 왜 그리 뜨겁던지. 풀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치솟던 열기에 가슴.. 2022. 7. 18.
아내의 소중함을 깨우쳐준 호미 이야기 / 유병덕 현직에서 수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냈다. 여러 사람과 마주하느라 가족을 잊고 산 것 같다.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들은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나 홀로 내 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생경하다. 더욱 난데없는 역병으로 어디 가나 빗장이 걸려있어 난감했다. 갈 곳 없어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강돈묵 작가의 를 읽으며 잊고 지냈던 반쪽을 찾았다.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 2022. 7. 18.
시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 이어령 시(詩)를 쓰려거든 여름바다처럼 하거라. 그 운(韻)은 출렁이는 파도에서 배울 것이며 그 율조(律調)의 변화는 저 썰물과 밀물의 움직임에서 본뜰 것이다. 작은 물방울의 진동(振動)이 파도가 되고 그 파도의 진동이 바다 전체의 해류(海流)가 되는 신비하고 신비한 무한의 연속성으로 한 편의 시(詩)를 완성하거라. 당신의 시(詩)는 늪처럼 썩어가는 물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시(詩)의 의미는 바닷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긴 꼬리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뭍에서 사는 짐승과 나무들은 표층(表層) 위로 모든 걸 드러내 보이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작은 조개일망정 모래에 숨고, 해조(海藻)처럼 물고기 떼들은 심층(深層)의 바다 밑으로 유영(遊泳)한다. 이 심층 속에서만 시(詩)의 의.. 2022. 7. 16.
이다희 시인 이다희 시인 1990년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조선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하였다.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시 창작 스터디』가 있다. 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 2022. 7. 15.
운문사의 노송 / 변종호 늘어선 노송군락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천년 고찰을 수호하느라 저마다 가슴팍에 상흔을 새기고 있다. 긴 세월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리고 줄지어 서 있는 노거수는 오백 나한의 모습이다. 일주문 대신 들머리에 도열한 소나무는 하나같이 일제의 만행을 간직하고 있다. 수령 일백 년을 훌쩍 넘어섰을 노송, 제 몸을 톱으로 유린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도리 없이 진을 뽑아야 했던 민초의 가슴도 쓰렸으리라. 청도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정갈한 비구니 도량에는 보존하는 보물도 많지만 꼭 찾아보고 싶은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소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세 번째로 지정됐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이면 비구니 스님들은 오백 년을 살아낸 노송에 막걸리 열두 말을 물에 희석하여 공.. 2022. 7. 15.
음음음음 음음음 / 오차숙 내가 노래하는 무대에는 조명등이 희미해 생명의 싹이 움트지 않소 꽹과리를 두드리고 장구를 내리쳐도 푸른 감흥이 일어나질 않소 영혼의 날개마저 거세당한 탓인지 관객의 깊은 환호성과 무대의 퀭한 종소리도 오래도록 들리지 않소 버선발로 뛰쳐나가 뱅그르르르 뒹굴어 볼까 하얀 적삼 걸치고 나가 관객석을 배회해 볼까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뭐여라 그으래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오 생은 한 판 그래픽 소설이라고 생은 한 판 춤사위라고 한 판의 춤사위는 천 개의 단어를 조립한 말장난보다 느낌을 줄 때가 때로는 있다오 남사당패들의 외줄타기 외로움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의 행로를 걸어가더라도 호오 탕한 춤사위는 삶을 지탱시켜 주는 이유가 되거든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 2022. 7. 15.
이영광 시인 이영광 시인 1965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이 있다. 제8회 노작문학상, 제11회 지훈상, 제11회 미당문학상, 2011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검은 봄 / 이영광 나는 칼이요 분열이요 전쟁이다/ 사랑과 통합과 연대의/ 적이다/ 나는 찌르고 파괴하고 흩날린다/ 나는 가장 작고 가장 크며/ 가장 보이지 않는다/ 변함 없이 따사롭다// 피 흘리는 가슴이요 찢어지는 아픔이며/ 나를 모르는 격투다/ 나는 가르고 나누고 뜯는다/ 숨 .. 2022. 7. 14.
흐린 날과 맑은 날 / 맹난자 쾌청하게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우울하게 흐린 날은 흐려서 좋다. 비 오는 날, 비에 갇혀 하릴없이 흐려진 창 앞에 우두커니 서면 안개비와도 같은 음악의 선율이 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대체로 이런 날은 첼로의 음반을 걸게 된다. 막스 브르흐도 좋고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도 좋다. 첼로의 G선은 때로 사람을 영적(靈的)으로 만들고 심신을 편안한 이완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 맥박도 느려지고 호흡도 진정되어 깊은 선율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마치 지하 동굴의 계단을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거기 어느 신(神)적인 존재와 만나게 될 것도 같다. 비는 곧잘 사람을 회고적(懷古的)으로 만든다. 비밀 서랍 속에서 동경(銅鏡)을 꺼내 들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점검하는 엄숙한 제의(祭儀) 같기도 한순간이다... 2022. 7. 14.
한철의 짧은 여름 人生 / 원종린 여름이 다가오면 여러 해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제자가 던진 시답잖은 질문이 가끔 머릿속에서 맴돈다.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다가 정년을 계기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삼복더위에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겼던지 나는 낯선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난날의 여자 제자를 만났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인사를 안 하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없지는 않다. 또 헤어지고 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났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기가 일쑤다. 그 제자도 그런 경우인 셈인데 다만 그때 나에게 던진 질문 한 토막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서로 근황을 묻는 인사가 끝나고 나자 그 제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여름하고 겨울하고 어느 쪽이 더 좋으.. 2022. 7. 14.
고우(苦雨) / 오횡묵 번역문과 원문 모든 일에는 중도가 귀하거니 즐거움의 끝에는 슬픔 또한 생기는 법 홍범(洪範)에 비 오고 볕 나는 것은 길흉의 징험이니 너무 없고 너무 많은 것 전부 흉하다고 하였지 가물 때는 비가 그리워 많이 와도 싫지 않다가 막상 많이 올 때는 그 근심은 또 어떠한가 농가에서 백로에 비 오는 것 가장 두려우니 한 뙈기 땅에도 지나치면 벼가 상한다네 조물주의 심한 장난이 어찌 편벽되었단 말인가 내 구름 타고 올라가 하늘에 고하여 비렴에게 짙은 구름 쓸어버리게 하고는 지팡이 짚고 외곽으로 나가 싱그러운 광경 보고 싶다네 萬事中爲貴 만사중위귀 樂極亦生哀 락극역생애 箕疇雨暘叙休咎 기주우양서휴구 極無極備均㐫哉 극무극비균흉재 旱時思雨不厭多 한시사우불염다 及到多時悶又何 급도다시민우하 農家最怕白露雨 농가최파백로우 差.. 2022.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