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닌 지 꽤나 오래되었다. 의대생으로서 6년, 그리고 환자로서는 11년.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일주일 가량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열이 좀 떨어지는가 싶더니 온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근처 병원에 입원을 하고 이런저런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고 심해지기만 했다. 힘들게 추가 검사를 하고 난 며칠 뒤 의사가 병실에 들어와서 부모님을 따로 데리고 나가 무슨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그날 밤새 울었다. 독서 수업에서 그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순간이 있나요?” 수업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가족들이랑 바다에 놀러 갔던 것? 강아지를 키우게 된 것? 어떤 게 내 터닝 포인 트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선생님이 말했다..
화장실이 부뚜막 같다. 수선사 주지 스님의 뜻이라고 한다. 해우소나 뒷간이 주는 절집 인상이 여기서는 무너진다. 실내화가 얌전히 놓였는데도 맨발로 들어가는 이가 적지 않다. 옆으로 길게 뻗은 화장실 창은 거치적대는 바깥경치를 잘라내 액자가 되고, 근심을 푸는 속인은 틀 안에 들어온 풍경화를 제 것인 양 누린다. 고졸한 대웅전이 살림집 안채 같고 곳곳에 놓인 돌그릇이며 고른 잔디와 소담한 연못은 한옥 마당처럼 인정스럽다. 신들의 집이 예사로워 오히려 신성하다. 그리 높지 않아도 산바람이 있어 지글거리는 도시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눈앞에 놓인 첩첩의 산을 바라보며 해를 피해 앉았는데 희미한 풍령 소리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다. 지리산 웅석봉 자락, 변두리 작은 사찰, 거기 추녀 끝에 조그마한 풍..
저기서 꽃 무더기가 걸어온다. 포개고 또 포갠 꽃숭어리들을 한 아름 안은 엄마가 만삭의 임부처럼 뒤뚱거린다. 꽃들이 앞을 가리고 잎사귀가 눈을 찌른다. 화사해서 더 가늠이 안 되는 무게가 묵직하게 배를 타고 내려간다. 그래도 씨억씨억 잘도 걷는다. 염천의 햇발이 자글거려도, 엄동의 된바람이 칼춤을 추어도 기어이 희붐한 새벽길을 열어 꽃 떼를 몰고 간다. 동살 아래서 분홍, 오렌지, 보라, 연노랑 꽃주름이 일렁인다. 사람들이 꽃을 본다. 꽃만 본다. 깍짓동만 한 무더기에 가려 발은 보지 못한다. 꽃들이, 댕강 잘린 발목으로 그들의 꽃밭을 떠나왔음도. 꽃집 앞에서 망설인다. 꽃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는 일도 거의 없다. 그래도 작정하고 나선 길이다. 통유리문으로 꽃꽂이를 하는 여자가 보인다. 연분홍 거베..
버려진 섬처럼 널브러져 있다. 닻을 내린 채 접안 순서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느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먼 길을 돌아온 배는 사력을 다한 마라톤 선수처럼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지친 몸을 바다에 뉜다. 언제부터 정박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대형 화물선을 향해 바지선 한 척이 힘겹게 다가간다. 배는 암초에 뿌리를 내렸다. 어쩌다 파도가 철썩거려도 본체만체한다. 간을 보듯 부딪치던 물결도 제풀에 지쳤는지 이내 잦아든다. 잔물결에도 들썩거리는 작은 배와 달리 가끔 항구를 드나드는 큰 배가 만든 너울이 힘차게 밀려와도 수문장처럼 제자리를 지킨다. 때로는 탯줄을 자르고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안태본 조선소가 멀리 보여도 가만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묘박지錨泊地는 닻을 내린 배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객선이..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다닥다닥 ..
빛은 지문이고 서사시다. 등대는 땅의 끝과 바다가 시작되는 경계에서 뱃길을 인도한다. 뱃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나침판이며 길라잡이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불빛은 지루하고 긴 항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메시지다. 고독과 낭만의 대명사로 마음을 훔치는 마력을 지녀 뭇 발길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천 년을 이어온 등대의 불빛은 희망을 이끄는 언어이고 위안을 주는 상징이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바다로 나아갔다. 뗏목이나 통나무배를 타고 어로 활동을 하였다. 좀 더 멀리 나가면서 두려움을 안고 검푸른 바다에 밤낮으로 배를 띄웠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천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호기심으로 찾아 나선 뱃길이 세계를 연결하는 수많은 바닷길을 만들어냈다. 거친 파도를 거느린 바다는 불안..
아들이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 직장을 따라 타지역으로 나간 아들을 보며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 소실점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열차가 밟고 지나간 평행 레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오늘 나는 철길 위에 이별의 시詩 한 소절 뿌렸다. 돌아오는 길, 하늘로 솟은 건물들이 압도적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높이를 자랑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옆에는 새로운 빌딩이 철을 수직으로 세우며 높이 치솟는다. 철은 이 시간에도 강인한 힘으로 문명을 드높인다. 철이 있어 우리는 하이테크 문명을 구가한다. 가히 신철기시대라고 할만하다. 철철철, 철이 넘칠수록 인간은 번영을 누렸다. 철을 화덕에 넣어 빨갛게 달구고 두들기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도 강인해졌다. 철기로 무..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 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아있던 습과 종이의 물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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