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사랑 / 배한봉 가을이 갔다고 영영 겨울이겠나 겨울 왔다고 꽃 한 송이 피지 않겠나 눈 내리는 날 여수 오동도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동백꽃 동백꽃은 숨 가쁜데 겨울이라고 꽃 한 송이 못 피운다면 그건 사랑 아니지 동백꽃 그만큼 뜨겁게 피니까 봄은 오는 거다 춥고 어둔 날에는 나도 내 마음 속의 동백꽃을 꺼내 두손 꼬옥 감싸 안는다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
울음 감옥 / 김원식 수번 1258, 죄명은 불효다 수원법원 가는 하늘 길에 낮달이 조등처럼 떠 있다 어머니 떠나신 지 백 일째 슬픔을 견뎌온 시간들이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다 고개 돌리면 배롱나무 꽃 그리움을 꾹꾹 쟁여서 백 일 동안 달군 울음 덩어리를 벌서듯 매달고 서 있다 상엿소리 홀로 가던 날 목백일홍 떨어질 때마다 꽃상여는 자주 발길을 멈췄다고 그때마다 엄마는 뒤돌아보며 갇힌 자의 울음을 들었으리라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린 나는, 엄마의 칠월을 밤이면 울었다 데칼코마니-아버지 / 김원식 아버지는 칭찬도 화를 내며 하셨다/ 전교 우등상을 받던 날/ 궐련은 물며 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노름판에서 논밭뙈기 쏵 날려 불고/ 저것을 어찌 갤 켜, 먼 조화여 시방.”/ 눈보라에 빈 장독 홀로 울던 새벽,/..
막걸리 / 함민복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
쓸쓸한 그것 /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어머니 / 나해철 어머니/ 한 말씀 하세요/ 그 때 범람한 강물에/ 잠겨 흐느끼던 문전옥답을 바라보며/ 하시던 한 말씀 다시 들려 주세요/ 어머니/ 끊기지 않는 뿌리손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일어서시는 어머니/ 안식의 밤에도/ 고이 쉴 수 없는 별같은 뜬 눈장이들의/ 지새움의 산하를 기어코 일구어 푸르게 하시는/ 어머니 한 말씀 듣고 싶어요/ 그 때 모질던 어느 때에도/ 삼천리 방방곡곡 울리던 그 말씀/ 다시 토해 주세요/ 어머니/ 이 땅 이 하늘..
북어(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공터 /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피아노 /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랑 / 전봉건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
하상욱 - 나무위키 트위터 계정 프로필 사진 위 사진은 단편시집 '서울 시'의 '목차' 부분에 나온 사진이다. '서울 시' 단행본 중간의 사진들을 보면 이 사진을 찍으려고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하며, 하상 namu.wiki 좀 더 대충 살아야 꿈이 보인다 - 하상욱 『서울 시』 | YES24 채널예스 네 줄의 짧은 시로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서울 시』의 저자 하상욱. 작가,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아직은 어색한 그는 아주 우연히, 전자책을 내게 됐고 단행본을 펴내게 됐다. SNS 시인, 애니팡 ch.yes24.com [TEC콘서트] "두려움이 준 용기 없는 도전조차 도전" 하상욱 시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짧은 문장으로,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우리는 '시(詩)'라고 부른다. 짧은..
목숨 / 박이도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니는 강아지처럼 나는 남의 이야기에 나를 빼앗기고 손오공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상만사 낌새도 못 차리고 겨울 개구리 잠자듯 좁고 답답한 어둠 속에 허깨비처럼 살았구나 그때의 시간은 현실이었나, 꿈이었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가계(家系)를 선포하고 영웅 신화들은 생명의 존엄을 선포한다 결코 철학적일 수 없는 목숨이어라. 해빙기 / 박이도 봄밭엔 산불이 볼 만하다./ 봄밤을 지새우면/ 천 리 밖에 물 흐르는 소리가/ 시름 풀리듯/ 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깊은 산악마다/ 천둥같이 풀려나는/ 해빙의 메아리/ 새벽 안개 속에 묻어오는/ 봄 소식이 밤새 천리를 간다.// 남 몰래 몸 풀고 누운 과수댁의/ 아픈 신음이듯/ 봄밤의 대지엔/ 열병하는 아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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