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도포를 입은 양반이 선비를 만나 통성명을 하려고 마주 엎드려 절을 하는데, 초랭이가 달려와서 엉덩이로 양반의 머리를 깔고 앉는다. 정자관을 쓴 양반의 이마가 흙바닥을 찧는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양반이 사대부의 자손이라고 말하니, 선비는 팔대부의 자손이라고 비꼬고, 양반이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하니, 선비는 팔서육경을 읽었다며 빈정댄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웃을 때는 턱이 먼저 덜렁거린다. 콧등 좌우에 붙어있는 밤톨보다 굵은 콧방울에는 움푹 뚫린 콧구멍이 벌름댄다. 눈 아래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길고 두툼한 근육이 입꼬리를 당겨서 귀에 건다. 실눈을 감싸고 있던 눈꺼풀이 길게 호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볼록한 애교살의 끄트머리를 잡고 관자놀이까지 휘달린다. 미간에..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듯하더니 주흘산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낯익은 냄새가 코끝에 스며든다. 달덩이가 망댕이가마 속에서 떠오를 채비를 하는 걸까. 열기와 사투를 벌이는 것은 아닐까. 입술 앙다물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각기삭골(刻肌削骨)의 시간을 견디느라 밤잠을 설쳤으리라. 문경 초입에 들어서니 조령천변 운무가 화들짝 가슴에 안긴다. 계곡에 부는 산바람과 더불어 닿은 곳은 국가 무형문화재 전수관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이라고 쓴 석조 조형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조선 영조 이래 300년 맥을 이어온 사기장인 백산 김정옥 도예 명장의 전수관이다. 어디선가 발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들린다. 작업장에 들어서니 수비를 거친 흙덩이를 치..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삼강주막 툇마루에 걸터앉아 속절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이 비는 그칠 줄도 모른다. 유난히도 긴 장마다. 나루터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조차 비를 머금어 후텁지근하다. 한때 보부상들과 사공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이젠 전설처럼 이야기만 전해올 뿐 예전 일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많은 나그네는 다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주모, 여기 막걸리 한 통 주시오.” 부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늙은 주모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술상을 차리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진 길손들의 왁자한 삶의 애환들이 환영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한 유옥연 주모가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60여 년을 운영했던 예천 삼강..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가을 속에 여름이 갈마들어 있다. 그 여름 염천 뙤약볕 속의 짙푸른 은행나무를 보면서도 내심은 달포가 좀 더 지나면 샛노란 황금나무로 물들어 있을 그 휘황찬란함을 떠올렸다. 그러니 저 황금빛 노랑의 갈무리 속에 저 여름의 진초록 생색이 다스려져 있다. 어머니의 생전에 한 번 다녀왔으면 싶어 내심 점지해 둔 곳이 운문사 도량이었다. 그 경내의 늦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정취를 당신 눈 안에 넣어드리고 싶었다. 수백 년 된 샛노란 노거수(老巨樹)는 당신이 보셨더라면 저승에 가셔서도 눈에 삼삼하니 수시로 아들 생각을 하기에 맞춤한 선처가 아니었을까. 사람으로 치면 지워지지 않는 눈부처 같았을 것이다. 혼자 갔지만 어머니 생각이 오롯하니 내 마음에 팔짱을 끼고 풀지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강물은 개경포에 이르러 긴 숨을 고른다. 철석, 철석, 연둣빛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강둑 포구를 살짝 때리고 가기도 한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적막한 낙동강의 해 질 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이 나루터에서 일어났던 전설적인 이야기가 수면 위로 여울져간다. 조선 초(1398년) 봄, 한적하던 고령 개경포에는 때 아닌 시끌벅적한 소리로 강마을은 부산했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고을 원님도 행차하고, 승려, 구경나온 포구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소달구지까지 동원되어 줄지어 서 있다. 길 한쪽에는 조선팔도에서 오늘의 이 행사를 참관하러 온 의관을 갖춘 선비들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이운 행사에 육신 공양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밤꽃이 피는 유월이다. 군위 한밤마을 밤나무도 한창 밤꽃 향기를 흩날린다. 밤이 크다고 해서 ‘한밤’인데, 밤보다는 돌담에 더 눈길이 간다. 멀리서 보면 담도 마치 알밤으로 쌓은 듯한 착각이 든다. 가벼운 행랑 하나 메고 미로처럼 마을을 돌고 도는 돌담길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유서 깊은 곳이 많다. 부계홍씨종택, 대청마루, 남천고택에서 옛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킨 노거수 잣나무의 위용과 대율사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미소를 만날 수도 있다. 목마르면 예주가에 잠깐 들러 잘 빚은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이를 찾아 골목을 걷다 보면 돌담의 매력에 빠져든다. 돌담에서 돌들은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아랫돌, 윗돌, 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제2라는 말이 슬쩍 거슬렸다. 그래도 내친김이라 차는 한티재를 거쳐 어느새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군위 석굴암은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1세기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이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다. 군위 삼존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 초기의 석굴암이다. 경주 석굴암이 먼저 발견되어 유명해지는 바람에 제2석굴암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이 동생이 돼버린 셈이니 군위 석굴암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겠다. 사물의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삼존석굴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존석굴은 팔공산 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청량대운도는 봉화의 청량산을 옮겨놓은 진경산수화다. 무려 넓이가 46m, 폭이 6.7m나 되는 세계 최대의 그림이다. 야송미술관에 걸린 이 풍경화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살펴보려면 적어도 100보의 걸음을 떼야 겨우 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대작이다. 이원좌 화백이 2m의 장대 끝에 붓을 매어 혼신으로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완성했다는 청량대운도, 그 속에 나는 지금 한 점이 되어 서 있다. 그림은 청량교를 막 지나는 모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 하나가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모자가 무슨 깊은 사연을 안고 깊은 산길을 가려 하는가, 얼핏 산마루턱에는 청량사 절 지붕이 보이는 것도 같다. 두 모자가 거길 가려는가. 나는 어른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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