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소리를 들으면 색깔이 보인다. 내 기억 속에는 많은 소리들이 저장되어 있다. 소리들은 그들을 탄생시킨 배경을 가지고 있고 배경은 색깔로 내 기억 속에 이미지화 되어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여다보면 소리는 그가 가진 빛깔의 색채로 펼쳐진다. 빗소리는 황토색깔이다. 봄비치고는 제법 굵은 비가 흙냄새를 날리며 황토 마당을 적신다. 꼬마는 큰형의 커다란 군용 우의를 머리 위로 덮어쓰고 비 오는 마당 가운데 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꼬마만의 독특한 빗소리 즐기기다. 우의 자락이 사방으로 비에 젖은 땅바닥에 쫙 깔려 바깥 세계와 완전히 밀폐되면 우의 속은 작은 텐트로 변한다. 땅의 지열과 꼬마의 체온으로 텐트 안은 금방 따뜻해지고, 황토 향기 은은한 공간 속에서 빗소리의 연주가 시작된..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금상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비가 오면 따스함이 그립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을 나선다. 빌딩 숲을 벗어나 붉은 벽돌 담장을 따라 한없이 걷는다. 어느 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 가락 소리처럼 정겹다. 이렇듯 비 오는 날 고샅길을 거닐면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의 흔적들이 한 올 한 올 되살아난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길 저만치에서 빗속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는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옆구리에서 삐져나온 한 아름의 신문 더미가 곧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반쯤 흘러내린 바지춤을 연신 추스른다. 훌쩍거리는 코를 소매로 닦으며 골목길을 누빈다. 슬그머니 소년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초등학생 무렵엔 내남없이 가난을 전염병처..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여보! 큰일났어. 다육(多肉)이들이 이상해!” 새벽 5시 반, 언제부턴가 아침잠이 없어진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5시 반이란 시간은, 나에겐 잠을 자야하는 새벽인데 남편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을 의미한다. 못 들은 척, 달아나버리려는 잠을 꽉 붙잡으려고 이불을 머리까지 푹 눌러 덮었다.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자긴 틀렸구나 싶어 비몽사몽 베란다 화분 쪽으로 가보았다. 다육이들이 이상하다. 싱싱하던 푸른 잎들은 누런빛을 띄고, 오동통하던 줄기들도 힘이 없다. 그 다육이들은 화분 잘 키우기로 자칭 타칭 재야의 고수인 친구가 몇 달 전 우리 부부에게 준 것이다. 정년퇴직도, 명예퇴직도 아닌 희망퇴직을 한 남편을 걱정하는 내게, 위로 대신 건넨 선물이다. 퇴..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모니터 속 글자들이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듯 모여 있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주어야 하기에 수십 가지의 서체들을 대입시켜 보지만 영 마뜩잖다. 한참을 이 옷, 저 옷으로 바꿔 입혀 보다가는 정해진 결론처럼 고딕과 명조로 마무리한다. 모두들 제 나름의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나는 글자들을 배열하고 다듬는 일을 한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던 시절에는 틀에 박힌 글자 모양만도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수많은 글자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딕과 명조는 글자체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고딕은 제목 글자체로 탁월하다. 우직하고 곧은 획은 어떠한 역경에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본문을 이끌..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파란 하늘에 빨간 댕기가 팔랑거리고 옥색 치마가 풀썩인다. 널뛰기는 정월이나 단오, 추석에 하는 전통 놀이이다.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서 신명나게 구르고 뛰는 한 판 놀이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세뱃돈 모금이 끝나면 하나둘 배꼽마당으로 모였다. 구슬치기도 하고 제기를 차다 보면 쿵덕 쿵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자들의 널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틈에 하던 놀이마저 팽개치고 달려가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처자들은 널을 뛰기 전에, 멍석을 둥글게 말아 만든 널받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골랐다. 이윽고 널빤지 위에 올라 눈 맞춤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굴러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널뛰는..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여행 사진을 들여다본다. 유난히 기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많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내 모습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안정감 있고 편안해 보인다.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 구조물이다. 위의 하중을 받아서 아래의 바닥으로 적절하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건물이 제대로 공간을 유지하고 서 있게 하는 장치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기둥이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신석기 시대의 수혈 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수혈의 안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서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본다. 몇 해 전, 인생길에서 복병처럼 숨어있던 힘든 일을 만났다. 건강이라는 물리적인 기둥과 바른 ..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늙수그레한 당목 하나가 먼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다. 타종을 멈춘 지 오래되었나 보다. 발갛게 얼어있는 몸 위로 켜켜이 가라앉은 먼지가 아버지의 백발처럼 덥수룩하다. 이마를 쓸어 올리듯 당목을 어루만지다가 흠칫 놀란다. 나무의 결을 따라 딱딱하고 꺼칠꺼칠한 삶의 이력이 손가락 끝에 까맣게 묻어나온다. 종을 치는 막대기를 당목이라고 한다. 박달나무나 고래의 뼈로 만들어서 쇳소리가 날 만큼 단단하다.?종이 소리를 울리는 동안 당목은 수도 없이 제 몸을 부딪쳤다. 한번 타종할 때마다 되돌려 받은 충격이 일파만파 육신을 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옹이 없이 매끈하던 몸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닳아서 굳은살이 박였다.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비천상을 조각한 종신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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