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진한 커피로 식곤증을 몰아낸다. 아이들이 하품하고 졸음에 겨워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무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눈동자가 말똥해지는 시간이 아니다. 나른한 오후 2시 타임, “쾅”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포 소리 같이 우렁차지만 짧은,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리다 정면으로 부딪칠 때, 몇백 년 된 나무가 한순간에 쓰러질 때나 나는 소리였다. 덜덜덜 책상이 마구 흔들렸다.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지진인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움직이지 마”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책상을 붙들었다. 꽉 잡은 손에도 아랑곳없이 책상은 책을 흩뜨리고 연필을 굴렸다. 두려움에 확장된 아이들의 눈동자가 나에게 쏠렸다. 눈빛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도 한 아이..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큰 딸이 만들어 온 청첩장에 남편의 이름이 없었다. 양친의 이름 뒤에 소롯이 달린 사위와는 달리 홀어미 뒤에 달랑거리는 이름. 순간 아이가 조금 추워 보였다. 내가 오랜 시간 부여잡고 버틴 분투에서 명백하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부서진 틀의 모서리를 붙들고 휘청거릴 때마다 때론 불안하게, 때론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하는, “이제 그만 손을 떼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비로소, 불안했으나 고집스럽게 이어 붙여 놓은 틀이 완전히 부서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자꾸 부서지고 틀어지는 아귀를 맞추고 수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아이의 아비는 어느 날부터 가족 명단에서 슬금슬금 빠졌다. 스스로..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똥을 뺀 멸치의 배가 홀쭉하다. 잘 건조된 듯하지만 바다에서 한 생을 보낸 몸에서는 채 마르지 않은 비릿한 바다의 흔적이 묻어난다.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습기를 날린 멸치와 표고, 무, 다시마와 함께 대파는 뿌리 채 한 솥에 넣고 푸욱 우려낸다. 하얀 김서리에 묻어나는 멸치 다시물냄새에 굳게 닫혔던 마음이 빗장을 연다. 남해 통영에서 멸치 두 박스가 택배로 왔다. 육수용과 죽방멸치다. 뒤죽박죽 서로 엉켜서 담긴 육수용 멸치와는 달리 죽방멸치는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 정연하다. 마치 반듯한 선비의 자세를 보는 듯하다. 꼬리의 지느러미는 속살이 보일정도로 투명하다. 은빛 비늘 하나라도 상처를 입을까 조심스럽게 다룬 손길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반항의 흔적을 찾..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늘 뭔가가, 어떤 것 하나가 부족해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매일 새벽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빗자루를 들고 갔던 뒤안이 그런 공간이었다. 엄마의 낡은 냄새가 나는 그곳. 눈만 뜨면 뒤안을 쓸어야 했다. 엄마는 잠이 덜 깬 우리에게 빗자루를 쥐어 주며 마당을 쓸라고 했다. 동생은 앞마당을, 나는 뒷마당을 쓸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앞마당만 쓸면 될텐데 굳이 뒤안을 왜 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투덜대면서도 엄마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뒤안은 대체로 깔끔했다. 내가 부지런히 쓸기도 했지만 서까래가 담장 바로 앞까지 이어져 지저분한 것들이 바람에 날아들지 못하도록 지어진 탓도 있었다. 흙담의 한가운데에는 나름대로 멋을 낸 마름모꼴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밖의 풍경을..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너뱅이들 두말가웃지기 논배미를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새참을 나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큰길가 주막에서 막걸리 한 되를 받아 들로 향했다. 젓가락은 주전자 주둥이에서 딸랑거리며 나를 따랐고 김치 나부랭이 담긴 접시에선 곰삭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경지정리를 하기 전의 논두렁은 다만 논과 논 사이를 경계 짓는 것에 불과해 마치 실뱀처럼 좁고, 구불구불했다. 본래 논두렁은 두 사람이 비켜 갈 정도는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식구가 늘고 사는 것이 팍팍해지자 모 한 포기라도 더 꽂을 요량으로 논은 두렁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내가 양손에 물건을 들고 곡예 하듯 논두렁을 지나 아버지가 일하시는 논에 도착하면 막걸리 주전자는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등산은 왜 하는가’ 하는 화제가 친구 사이에 오른 적 있는데, 누가 선뜻 ‘산이 거기 있기에’라는 힐러리 경 말을 꺼냈다. 그래 ‘그 말은 멋만 부렸지, 좀 애매한 이야기 아닌가’ 하고 반문했더니, 멋진 대답 둘이 나왔다. ‘고마 간다’. ‘꽃 보러 간다’란 대답이다. ‘고마’란 경상도 사투리로 그냥 아무 뜻 없이 간다는 말이고, 꽃 보러 간다는 것은 순전히 웃으개 소리다. 꽃이 무엇인가. 해어화(解語花), 즉 등산 오는 여인 보러 간다는 것이다. 노년의 취미로는 불경 혹은 성경을 읽거나, 꽃나무를 키우거나, 필묵(筆墨)으로 한시를 써보거나, 바둑 두는 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어울리는 취미가 답산(踏山)이다. 노인이 지팡이 짚고 산기슭 거니는 모습은 신선을 ..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동트기까지는 아직 이른 시각, 모래톱은 포화가 끝난 전장처럼 높고 낮은 무덤이 즐비하다. 그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널찍하다. 흐릿한 물속에는 수많은 치어와 미처 바다로 나가지 못한 숭어 한 마리가 지친 지느러미로 제 몸을 지탱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위기에 갇혀 만조 시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사주 사이의 웅덩이에 갇힌 바닷물은 모래톱으로 밀려났다가 쓸려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때로는 높이, 때로는 낮게 오르내린다. 발등이 젖을까 봐 뒤로 물러섰다가 숭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물웅덩이에 갇힌 숭어처럼 나 역시 선택을 간과한 대가로 실패의 덫에 갇혀 이곳 적요한 모래톱에 서서 갑갑한 심사를 달래며 고독과 대치하고 있음이..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특별상 뼈들이 흐지부지하게 널려있다. 정의라고 신념 했던 가치나 사실들이 제대로 열려지는 일들이 없었다. 살아가는 일들이 내 생각과는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사불여의. 뼈대 있는 가문이니, 뼈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집성촌의 고택과 같이 거대한 가문에서나 있을 수 있는 먼 일이었다. 나를 세울 수 없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고 만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의 뼈에 많은 억압을 가했다. 특히 외삼촌들과의 다툼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만 나무랐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외삼촌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작은 외삼촌은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나 여러 번 낙방했다. 본인은 물론 친척들께도 많은 손실을 끼쳤다. 이웃과도 싫은 소리가 나면 원인보다는 아버지의 의견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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