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꽃보다 어여쁜 섬으로 간다. 파도 일렁이는 부두에 찢어질 듯 나부끼는 깃발을 보면, 살아 움직이는 섬으로 왜 떠나야 하는가를 실감한다. 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섬으로 쏜살같이 달음박질한다. 뱃전에 하얗게 부서지며 출렁이는 파도도 나에겐 신선한 감동이다. 낯선 섬으로 떠나는 여정은 삶의 또 다른 쉼이다. 섬은 큰 맘 먹어야 갈 수 있다. 배를 타고 오갈 수 있는 섬은 뱃멀미가 따른다. 특히, 비바람이 조금이라도 몰아치면 오가는 배가 전면휴업이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은 시종일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망망대해에 당그라니 고립된 느낌과 동시에 예상 밖의 묘한 해방감을 준다. 나는 지금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섬으로 간다. 섬은 잔재미가 있어 즐겁다. 불리는 이름만 들어도 흥미..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창밖이 뿌옇다. 무채색으로 천천히 변하는 광경은 하늘과 땅이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 같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 손을 휘젓는 사람처럼, 하늘에서는 땅 쪽으로 나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가 보다. 허공에 정지된 채 방향을 선뜻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망설이는 눈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민들레 꽃씨 같다. 혹은 밍밍하고 탄력없는 밥풀에 살짝 숨어있다 그윽하게 입안에 번지는 식혜의 맛처럼 달콤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랑처럼, 날리는 속도는 더디고 방향이 일정치 않다. 그래서 신비롭다. 소담스럽고 기운차게 펑펑 쏟아지다가 운명처럼 닿는 순간 더러 녹으면서도 순식간에 쌓이고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은상 할머니 가슴에 뚫린 구멍은 오직 당신만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 중 행방불명된 아들 덕주 때문에 생겨난 구멍은 해마다 깊어지고 넓어졌다. 가끔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구멍이 점점 더 넓어져 할머니를 삼켜버리는 건 아닐까, 할머니가 그 구멍 안으로 빠져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벌린 입 사이로 할머니의 생이 드나들었다. 들숨으로 할머니에게 덕주가 들어갔고 날숨 속에 할머니 안의 덕주가 나왔다. 뼈만 앙상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연명을 위한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다. 말이 드나드는 구멍인 입으로 한탄, 체념, 절규의 언어가 쏟..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뇌가 찡 울린다. 정신이 혼미 할 정도로 아픔이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베란다 벽면에 짤막한 못 하나를 박다가 그만 서툰 망치질에 못 머리를 친다는 것이 못을 잡은 내 왼손을 후리치고 말았다. 시퍼런 피멍과 통증이 단번에 엄습한다. 손가락을 움켜쥐고 푹 주저앉아 통증이 머져지기를 기다렸다. 너무 아픈 나머지 죄 없는 입술마저 깨물어 이중으로 신체 일부에 치명타를 날린 것이다. 문득, 수십 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올라 가슴속이 불거진다. 삶의 무늬에는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어진다. 엄마 가슴에는 진한 슬픔의 무늬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단단한 대못으로 박혀 돌덩이 같은 피멍은 가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넉넉한 집의 딸에서 또 그만한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가을 태풍이 휩쓸고 간 지난 주말에 고향집을 찾아갔다. 마당은 온갖 나뭇잎과 쓰레기로 엉망이 되었으며, 흙탕물로 얼룩덜룩한 바람벽은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틈이 많았다. 집안을 예전처럼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였다. 고르지 못한 벽을 손으로 훑는데, 겨울이 지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뼛속까지 시린 칼바람이 불어올 것만 같아 뒤통수가 서늘했다. 서둘러 매흙질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흙질은 벽이나 부뚜막, 안마당에 매흙을 바르는 일을 말한다. 산비탈에서 퍼온 백토를 커다란 대야에 담고 물을 부어 흙탕물을 만든다. 그 물을 다른 그릇에 담고 하루를 재우면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데, 마치 흐트러진 상념이 가슴 밑바닥에 침잠하듯이 내려앉는다..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연이 날아오른다. 실패의 실을 감았다 풀었다 반복하며 바람을 조율하던 찰나 연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제 몸에 중심을 잡는 것도, 처음 만나는 세상도 연에게는 모든 순간이 낯설다. 하늘을 콕콕 찔러도 보고, 바람에게 제 몸을 맡겨보기도 한다. 곧이어 불어오는 바람이 좋은지 연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더 높이 올라가보겠다는 말이다. 실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연, 가을 하늘과 맞닿아 한 폭에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실패를 넘겨주고 사진을 찍으며 이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나와 아이들이 처음 만든 연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날개가 비뚤비뚤 잘린 ..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은상 적막한 빈 집에 석류꽃이 피었다. 주인이 없으니 햇볕을 받아 안을 힘조차 없어졌는지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았다.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며 혼자 살던 할머니를 기억이나 하듯 마루에 방치된 자그마한 냉장고를 본다. 잡초만 무성한 마당을 지나 한 열댓 걸음 걸어가면 별채에 달린 작은 방이 나온다. 그 방안에는 주인이 보다만 책들이 널브러졌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한번은 꼭 온다던 노모의 마음이 담긴 방이다. 낮게 쌓아놓은 담장 곁에 오래된 석류나무가 유난히 붉은 꽃등을 내걸었다. 고요하던 몸이 뜨겁게 들끓는다. 아무리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땀을 흘리지 않던 몸인데 갑자기 더워지면서 목덜미가 흥건해진다. 남들은 추운데 나는 덥고, 남들이 더울 땐 또..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은상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이 있다 거친 흙길을 돌아 돌아서 물길을 놓치지 않고 샘이라는 이름을 얻어낸 도래샘,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온전히 길을 찾아낸 작은 샘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모진 과정을 겪고 새로 태어난 샘의 안정된 모습은 얼굴을 들이대지 않아도 물 내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며 샘의 모습만 감상했던 나였다. 언제부터 샘이 이루어진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해탈의 과정을 겪은 듯하다. 안온한 얼굴에 깊숙이 자애로운 웃음 짓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돌고 돌아서 맑은 물줄기 샘솟는 도래샘 같은 모습으로 평온한 웃음을 전하던 그녀의 정연한 움직임을 기억하게 된다. 낮은 계곡 물 소리가 안내해주는 산길에 들어섰다. 처음 그 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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