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골짜기에 기댄 반촌이다. 하늘과 맞닿은 듯 풀벌레 소리만 이따금씩 들릴 뿐 인적 하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뜰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마당에는 비단풀이 발갛게 피었다.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중요민속자료 제23호)을 찾았다. 송첨종택은 양민공 손소가 세조 5년(1459년)에 지은 월성 손 씨의 종가이며 우제 손중돈 선생의 생가이다.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 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숨결이 넉넉하게 다가온다. 고택의 힘이 이런 것인가. 인걸은 가고 없어도 인적의 숨결은 살아있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으로 눈길이 간다. ‘書百堂’ 여기서 무슨 글을 백 번이나 쓰라는 것일..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역사는 침묵 속에 살아 숨을 쉰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허리를 돌아서면 산수화 같은 마을이 펼쳐진다. 비슬산 자락에 물이 달을 품는 수월리(水月里)다. 깊디깊은 산골이라 실개천만 있을 뿐 작은 물웅덩이 하나 없어 도저히 달이 내려앉을 수 없는 촌락이었다. 마을 이름을 천 년을 내다보고 지었을까. 긴긴 세월 동안 조용하고 고요했던 이곳에 댐이 들어섰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 위로 달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수월리는 제 이름을 찾았다. 물과 달은 혼자 오지 않았다. 댐을 건설할 때 무려 삼천육백여 점의 유물이 땅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시대의 것도 아니요. 선사 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이서국(伊西國)이 남긴..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10여 년 만에 울진 천축산 불영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길은 108개 연꽃이 새겨진 불영교를 건너 원시림이 울창한 숲으로 접어든다. 길게 이어지는 흙길 따라 있는 오밀조밀한 경관이 눈맛을 선사한다. 옥상상제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삼지구엽초가 자랐다는 신묘한 벼랑이 눈앞에 펼쳐진다. 기암괴석과 우거진 소나무 숲, 뫼비우스 띠처럼 펼쳐지는 맑은 불영천 물길이 우렁우렁 흐르며 감정회로를 자극한다. 이곳의 원시자연에는 불심이 들어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의 절경에 불심이 느껴지지 않으면 이상하다. 억겁의 시간에 걸쳐 빚어낸 대자연의 빼어난 솜씨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지 싶다. 불영사에 다와 가자 숲이 우거진 명상의 길이 구부정하게 이어진다. 바..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들풀 무성한 황룡사 공터에 장대비가 아프게 내리꽂힌다. 터줏대감인 양 둔중한 몸을 펼친 바윗돌이 비를 맞고 누웠다. 부동의 저 돌들도 한때는 우람한 사원의 뼈와 살이었을 텐데…. 일렁이는 풀 바람, 천년의 정기를 들이키며 서둘러 황룡사 역사문화관으로 들어선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어귀 깊숙한 맞은편에 기괴한 물체가 시선을 붙든다. 날개를 펼친 봉황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등신불 같기도 하다. 하단 안내지에 고딕체로 써진 두 글자, ‘치미(鴟尾)’였다. 새의 꼬리를 뜻하며 궁전이나 사찰의 용마루에 얹는 장식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전시된 치미는 지난날 몽고군의 습격으로 잿더미가 된 황룡사지에서 1970년대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높이 182㎝, 무게 100..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대가야 숲길을 걷는다. 산이면 보통 산인가. 오백 이십 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이 이곳에 묻혔다. 낙타 등같이 봉긋봉긋 솟은 칠백여 기의 왕릉과 묘가 즐비하다. 주산성에 올라 능선을 타고 미숭산을 향해 한참을 오르면 삿갓봉 정상에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탔다는 정자가 보인다. 이름하여 ‘청금정(聽琴亭).’ 청금정에서 내려다보면 북동쪽 골짜기엔 거대한 우륵지(于勒池)가 눈에 들어온다. 우륵지 아래로 정정골이라 불리는 가얏고 마을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 대가야의 후손들이 팽이버섯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가얏고 마을 바로 옆에 가야금을 형상화하여 지은 우륵박물관이 장엄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보이지 않지만 냄새로,..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땅은 하늘이 내리는 빗물을 받는다. 그 물이 벼를 키우고 사람의 양식이 되면서 나라를 융성하게 한다. 나라가 수리를 국가사업으로 삼는 이유이다. 비를 뿌리는 시기는 하늘이 정하기에 땅과 사람과 나라는 묵묵히 받아 모으고 건사할 뿐이다. 부슬비가 내리는 날 영천 구암리에 있는 청제(菁堤)를 찾았다. 채약산 주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거두며 천년 하고도 오백여 년을 견뎌온 물이다. 청제는 축조 연대(536년 신라 법흥왕 23)가 확실하고 기록물과 실물이 함께 보존되고 있는 신라 유일의 저수지로 겉모습은 여느 못과 다름없으나 의미가 깊은 못이다. 둑 아래로 백여 보를 내려가니 잘 정리된 비각 안에 보물 제517호 청제비와 청제중립비가 나란히 서 있다. 두께와 높..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옹이 깊은 나무가 손님을 맞이하듯 반겼다. 그의 아픔도 꽤나 깊었나 보다고 한참을 눈에 담았다. 35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굴곡진 삶을 살다 간 한 여인. 장희빈과 숙종 사이에서 사랑과 권력에 희생된 비운의 삶. 왕의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민초들까지 널리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는 그녀. 그녀가 장희빈의 계략으로 서인으로 강등되었을 때, 3년 동안을 머물며 복위를 기원한 곳이 바로 수도산 청암사다 ‘새도 나의 벗이고, 산과 꽃들도 나의 벗이니 외롭지 않구나.’ 안내도에서 단장을 한 고운 여인이 반긴다. 산길의 초입에서 왕후의 안내를 받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뒤로하고 인현왕후길로 접어들었다..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우린 병풍 같은 풍광 하나에 눈이 멎었다. 길 아래 몇 굽이 골짜기가 겹쳐 지나고 은빛 물결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동생은 한참 그곳을 바라보다 감회에 젖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용의 기맥이 끌어 당겼을까. 그 듬직함에 빠져 절로 발길이 옮겨졌다. 운문댐을 안고 경주 쪽으로 이십여 분 가다 보면 오롯이 깎여진 절벽 하나, 동생은 기이하게 뻗친 그곳에서 지난한 삶을 읽기라도 했는지 잠시 멀뚱해하다 안내판을 찬찬히 읽어 나갔다. 얼마 전 부지의 뇌경색으로 쓰러진 그는 바깥 활동이 힘들어 겨우 산책만 하는 정도였다. 그날 동생과 난 어떤 말도 없이 주변을 오래 떠나지 못했다. 구룡산의 거대한 용이 물을 마시기 위해 개울에 내달려온 모습을 하고 있다는 공암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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