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배꼽을 들여다본다. 옴폭 패인 그곳엔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탯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아직 뱃속의 양수에 잠겨 있을 적, 어머니는 한 줄의 제대정맥과 두 줄의 제대동맥을 내려 주었다. 나는 그 세 줄을 통해 신선한 산소와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뱉어내면서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내 태초의 집인 자궁은 어머니의 바다인 셈이었다. 바다를 본다. 이곳은 고래가 가끔 출몰한다는 포항 앞바다. 오래전 탯줄이 끊어진 날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탯줄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다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고래의 배꼽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엔 고래도 육..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왕이면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싶어 헌실마을로 돌아갔다. 걸어오다 보니 ‘비가 내려 탐방로에 물이 고여 있을 경우 우회 탐방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다. 물이 불어오르면 계곡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을 사람들도 큰 물에게 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들을 살펴 봐준다. 청송의 산하는 들판의 곡식들을 야물게 찧어주고 있지만 아직은 더운 바람이 꼬랑지를 짤랑거리며 돌아다닌다. 헌실마을 끝자락의 새마교를 지나 붉은 절벽 앞에 섰다. 중국 땅에 와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이 아닌 듯한 절벽의 빛깔이 낯설다. 노인은 도인(道人)처럼 소매 넓은 도포를 입고 강가에 널따랗게 자리 틀고..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사람 마음을 자꾸 낚는다. 무슨 알레고리를 숨겼기에, 삼천 년 나달 동안 시나브로 사람을 부른다. 앞에 선 쑥부쟁이 아가씨도 그 부름 따라온 것일까. 핑크빛 볼 수줍게 피어난 그녀는, 오늘도 캐릭터들 앞에 서서 그리운 임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마음 안테나를 뽑아 세운다. 그리워 시린 가슴 하나 툭 떨어진다. 앞에 서면 보면서도 모르겠고, 돌아서면 또 보고파지는 캐릭터. 사람을 애태우는 묘한 재주를 팬터마임으로 뽐내는 상(像). 퍼져 나오는 아우라(aura)에, 어떤 메시지가 실렸는지 그 앞에서 마냥 궁구(窮究)케 하는 실존. 무뚝뚝한 모습에 정나미 떨어지다가도, 눈 감으면 또 아련히 그리워지는 존재…. 바위벽에서 끊임없이 공연하는 캐릭터들의 팬..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새 두 마리가 낭창하니 날갯짓을 한다. 추상적인 나뭇가지 끝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어느 마을 솟대를 연상시킨다. 은실은 햇살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이고 청실과 홍실로 엮은 열매와 과실은 떨어질듯 탐스럽다. 불꽃이 절정일 때처럼 크고 환해지며 점점이 분명해져 온다. 색실이 밝고 윤택해서 평면에 박혀 있는 것들이 박차고 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절제된 자연물이 성스럽고 영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듯싶다. 멀리 야트막한 산지와 구릉으로 둘러싸인 소도시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아련한 마을에서 천년고도 고령 가야국의 혼과 얼이 느껴진다. 함창은 예로부터 누에고치에서 나온 명주실이 유명한 고장이라고 한다. 발길을 명주 박물관으로 돌렸다. 전통 물건부터 요즘..
2021년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도깨비 영감님이 납시었다. 관을 쓴 듯 불쑥 솟은 두 뿔, 선악을 꿰뚫어볼 듯 부릅뜬 두 눈, 쩍 벌어진 입, 펑퍼짐하고 주름진 코, 뻥 뚫린 콧구멍은 로댕의 지옥문에 나오는 오만과 탐욕의 동굴처럼 괴괴하기조차 하다. 누구든 마왕 같은 그의 앞에 서면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귀면와가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내려앉은 덕수궁 노거수 그늘에는 매미들이 궁이 떠나갈 듯 사이렌 소리와 나팔을 불어대며 도깨비 어른의 입궁을 격렬히 환영하고 있다. 언젠가 방송에서 녹유귀면와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천300여 년 전..
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 어머니는 빈손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팡이를 잊고 손가방마저 잊었다. 행여나 떼놓고 갈까 봐 몸만 따라나선 모양이다. 아흔 줄에 선 어머니의 걸음이 위태위태하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이마 골 주름도 덩달아 깊어간다. 그 속에 잠긴 수심이 동굴 속 그림자 같아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든다. 골굴사는 사람의 뼈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신라의 고승, 원효가 열반에 든 절이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풍화되었던 걸까. 암흑색 살점을 다 뜯기고 앙상한 뼈대로만 서 있다. 나뭇가지가 삭정이처럼 내려앉아 거무칙칙하여 기괴해 보인다. 바위의 윤곽선마저 거미줄 친 것처럼 얽혀있어 절이라기보다는 버려진 성채에 가깝다. 골굴사는 자연 타포니에 인..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금상 물소리, 바람 소리가 영혼의 울림처럼 투명하다. 사계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자계천을 따라 너럭바위가 세월의 깊이를 보듬는 녹음의 호위를 받으며 깔려 있어 선계에 온 듯 신비롭다. 회재 이언적이 이름 짓고 퇴계 이황이 새겼다는 세심대가 선명하다. ‘용추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린 후에야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경건해진다. 옥산서원이 눈앞이다. 유생들의 바른 생각이 계절의 붓끝으로 뚝뚝 묻어난다. 자연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정결하고 단아한 자세로 학문에 전념했던 이언적의 뜻을 기리고 배향하기 위해 서원은 세워졌다. 이언적은 거울이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오직 맑음을 취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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