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웃으로 지내던 지인이 돌로 만든 호랑이 한 마리를 안고 찾아왔다. 낡은 집을 헐고 집을 짓는 일터에서 집주인이 두고 간 것이라 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 혼자 시골에 가신 것을 아시고는 아파트보다 시골농장에 어울릴 것 같아 챙겨 왔다고 하였다. 주말이 되어서야 남편의 품에 안겨 들어서는 것을 어머니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지킴이 호랑이 데려왔다고 농을 하며 마당에 놓았다. 호랑이의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이빨이 예사롭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의 얼룩무늬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의 근육과 힘줄은 금방이라도 먹이를 낚아챌 것 같아 보였다. 당신의 천국에 온 것을 환영이라도 하는지 어머니는 어느새 다가가 달래 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병약한 어머니..
느낌 잘 안다고 한다. TV속 예쁜 개그우먼은 극중 배우다.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날라리 여고생 역할을 할 수 있냐고 묻는 메니저에게 잘 할 수 있다고 하였다. 1년 놀아보아서 그 느낌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맥주에 머리감아도 되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예쁜 개그우먼의 내숭 없는 대답에 TV를 보다 박장대소를 하였다. 요즘 소녀들이 맥주에 머리 감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30년도 더 지난 그때는 그랬다. 염색약이 흔치않아 아버지께서 전날 마시다 남겨놓은 맥주에 머리를 감으면 노랗게 맥주 색처럼 물이 든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참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생활에 잘 즉응하지 못하던 친구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쉬는 시간 교실 뒤편에 모여서 했던 말이..
길은 희망의 끈이다. 무한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앞길 저만치에는 신비의 요체가 기다릴 것만 같다. 그래서 가다가 멈추어서면 그 다음 길에 대한 궁금증에 몸살을 앓기도 한다. 대로에서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어쩌다 소로(小路)에 들어서면 그 길의 방향이 어디로 났는지, 혹은 어느 마을과 이어지는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인다. 그럴 때면 되돌아올까 하다가도 유혹을 떨치지 못해 더 나아갈 때가 있다. 그렇게 가닿은 곳이 매우 신선하여 희열에 차기도 하지만, 어느 시골집 마당이거나 도시의 철제대문이거나 할 때의 막막했던 기억도 몇 번 있다. 딛고 다니는 길에도 인연이 있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갈 때가 있는데, 태백산기행이 이번으로 다섯 번째다. 오래 전 처음 찾아간 곳은 경북 봉화군에 속해있는 한 ..
'오우가’ ‘어부사시사’로 널리 알려진 고산 윤선도도 나이 쉰 살 무렵에 성폭행 소문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고산은 결국 이 일로 반대 세력인 서인의 모함으로 경북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1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그러니까 남자의 허리하학에 관한 일은 로맨스와 스캔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요물이다. 그것이 관대하게 처리될 때도 있지만 잘못 걸리면 관직박탈 귀양 등 정치생명이 끝장나는 수가 흔히 있다. 조선 인조 11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이 직접 나선 전쟁은 조선의 완패로 쉽게 결론 나버렸다. 해남에 머물고 있던 고산은 노비 수백 명을 무장시켜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했다. 항해 도중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패전 소식을 들은 고산은 뱃머리를 남으로 돌렸다. 강화도 부근..
퇴직 후 서울에서 남의 고향인 이곳으로 몰래 살러 왔으니 이는 흔히 말하는 귀향(歸鄕)도 낙향(落鄕)도 아닌 도향(盜鄕) 혹은 잠향(潛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의 고장에 말도 없이 숨어들어와 제 잘난 척하다가 자칫 눈에 거슬리는 날에는 이 고장 토박이들의 텃세에 당장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들도 제자리 텃세를 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별 탈 없이 정을 붙여 6‧25를 전후해서 아버지 장삿길 따라 와서 살던 15년까지 합하면 올해 30년째 나는 이 고장에서 살고 있다. 뻐꾸기도 뜸부기도 내 어렸을 적 그 시절과 다름없는 울음소리이고 보면 마음 놓고 내 고향이라 소리칠 만도 하지 않은가.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한자성어도 ..
딸아이와 그림 전시회를 관람한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부터미널 전철역 입구에 야채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몇 개의 소쿠리에 담긴 소박한 야채들 사이에 어린 쑥이 보였다. 2월 중순인데 벌써 나온 것이 반가워 한 소쿠리 사들었다. 다음날 아침상에 쑥국을 올렸다. 지난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지만 집안에는 봄기운을 담은 쑥향이 번졌다. 한 입 뜨자 입안에도 향이 가득 퍼졌다. 덜컥 그 선배님이 보고 싶었다. 국을 먹는데도 자꾸 목이 메었다. 내가 수필 쓰는 것을 배우겠다고 문화센터에 갔을 때 선배를 처음 만났다. 수수한 차림의 선한 인상의 그녀는 늘 바빠 보였다. 몇 해는 가벼운 이야기만 하면서 지냈다. 인문학이나 의학,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기도 했다. 결혼 전 간호사..
언제나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즐겁다. 운동장은 하나의 화폭(畵幅)이다. 그 많은 여백(餘白)의 미(美)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풍경화라고 생각한다. 여름에서부터 봄까지 계절을 따라 바뀌어가는 자연현상(自然現象)만으로도 이 한 폭 그림은 아름다운 변화가 있다. 눈에 덮인 겨울 아침, 그 깨끗한 이부자리 아래 포근한 잠을 이룰 새도 없이 부지런한 강아지들 같은 아이들은 뛰고 넘친다. 낙엽이 소리 내며 굴러가고, 비둘기들이 잠시 학생처럼 내려와 나래를 쉬고 가는 가을의 오후도 있고, 장마에 갇혀 바나의 표정을 닮은 지루한 날이 개이면, 구름 그늘이 늙은 소사의 청소비처럼 쓸고 지나가는 분주한 여름의 대낮도 있다. 낯익은 아이들이 이별의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고 깨달을 무렵이면, 운동장엔 이미 낯 설은, 그러나 ..
처서가 지나니 무더웠던 날씨도 제법 선선해 졌다. 계절이 바뀌자 공원 입구의 계단부터 깔끔하고 새롭게 잘 단장해서 산뜻했다. 더위로 뜸했던 집 근처의 공원에는 아침 일찍부터 운동 삼아 산책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산길을 따라 오르막 길을 평소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우롭게 걸었다. 산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니 아담하고 예쁜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 올라 나뭇잎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건강 체조로 준비운동을 하고 주위를 바라보니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햇빛은 숲속의 모든 것들의 환영을 받으며 새 아침을 열었다. 이른 아침 나 보다 앞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계획적인 건강관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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