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에 나와 결혼한 아내는 늘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다녔다. 첫 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아내가 파마를 하고 내 일터까지 찾아와서 들뜬 모습으로 “여보 나 어때?”하고 물었다. 아내가 생전 처음 한 파마였는데 예쁘다거나 잘 어울린다거나 듣기 좋은 말로 맞장구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광판리에서 콩 팔러 온 아줌마 같네”라고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 버렸다.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나는 아내의 파마머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나온 길을 뒤 돌아보면 얽히고 설켰던 그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지난날의 사소한 오해나 엉뚱한 말 또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말로 사태를 그르쳤던 모든 것을 헤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소리나 감촉이 없지만 말과 행동을 통해서 향기, 감촉,..
이봉주 시인 △1957년 춘천 서면 출생. △한림대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료 △2015년 강원문학 전국신인상공모 신인상 당선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빛글문학회 동인 △낭만문학상 수상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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