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
그네 / 오만환 절대 믿음으로 매달려 일생을 산다 힘으로 밀면 힘있게 흔들리고 솟으라면 솟고, 신바람으로 춤을 추다가 온기 남은 그 자리 흔들림 속에도 중심은 있는 것 마음 맞는 사람 찾기가 쉽기만 하다면 살아서 흔들리지 않기가 즐겁기만 하다면 회안리에서 / 오만환 책보를 메고/ 칡뿌리 씹던 길/ 설레임으로 가다가보면/ 따비밭에/ 아버지의 머리칼/ 하얗게 덮여 있다가/ 이파리 돋우는 생각들// 술래가 된 비닐하우스/ 주인은 없고/ 머리에 부딪는 문짝 하나/ 한 세월의 바람을/ 막고 있다.// 초가이거나 기와이거나/ 하늘로 받들다가/ 손목 꼬옥 잡는 친구// 어디에 연으로 떠있는 것이냐/ 얼레의 실을 감고 감으니/ 언덕도 끌려오고// 둠벙을 푸고/ 미꾸라지 움키던/ 기억 푸른 거름더미엔/ 나비도 반가운/ ..
곰국 끓이던 날 / 손세실리아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마나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해 설 @절절하다. 자식으로 세상에 자식 낳고 뿌리 내리기까지 어머니를 먹..
백담계곡을 내려오며 / 윤제림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너 잘 걸렸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있는 여자. 입에는 샛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 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 리쯤 더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따라오지 않습니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나 다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내 따라 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외할머니 / 윤제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치악산 가을..
추천사鞦韆詞 – 춘향의 말·1 / 서정주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뉘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 ‘추천’은 그네의 한자어다. 다시 밝은 날에 ― 춘향의 말·2 / 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애기구름 같았습..
소만(小滿)에 이르렀다. 여름 문턱에 들어선 후 처음 만나는 절기로 햇볕이 많고 만물이 점점 생장하여 가득 차오른다는 의미를 가졌다. 실제로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는 시기,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던 꽃이 제 임무를 다하자 나무에게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이 져야만 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소만은 멸(滅)에서 생(生)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시기이다. 도도한 봄날이었다. 담벼락에 줄지어 서서 오줌을 누는 개구쟁이들처럼 노란 개나리가 새실거렸다. 목련은 나뭇가지 위로 촛대를 세우고 심지에 불을 밝혔다. 돌 틈에 앉은 영산홍도 한껏 타올랐다. 뒤이어 조팝과 이팝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하얀 튀밥을 쏟아냈다. 배와 사과며 복숭아나무에도 꽃이 피어 서로의 존재를 알렸다. 꽃을 보..
재채기 소리가 하루 열두 번도 더 들려온다. 재채기 한 방에 창문이 덜커덩거리고 이 여파로 아파트 담벼락까지 흔들리는 것 아닌가 싶다. 사람 몸속에 장착된 대 포탄. 버튼을 제 맘대로 조작하는 천지무법자 하나가 분명 몸 어딘가에 살고 있다. 심심하면 쏘아대며 이웃인 내 마음에 난동을 부린다. 뉴스에서 보니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견디다 못한 아래층에서 막대기로 천장을 쑤셔댔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 이웃 아파트에서는 한밤중에 어느 아저씨가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윗집을 들이박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한쪽이 이사를 가는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서는 층간소음으로 우발적 칼부림까지도 일어난다니 일상이 테러 밭 같다. 발자국 소리, 물 내리는 소리, 가전제품 돌아가는 소리에 비하면 재채기는 시답잖은 소리인가. 그..
불 꺼진 창문 앞을 오랜 시간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압화 접시를 꺼내 든다. 어딘가에서 눈비 맞으며 피었던 꽃잎들인가, 아니면 어느 길가에서 철없이 피어 원도 한도 없이 향기를 뿜어왔던 꽃들인가. 하얀 접시 위에 다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춘다. 물관으로 들이마시는 숨을 내뱉기가 힘이 들었다. 아마 심장이 짓눌리고 숨통이 조여들어, 마신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통과할 때 여리디여린 몸피는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힘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누군가 모로 뉘어주어 바늘구멍 같은 숨통이라도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다는 절규의 시간도 이미 사그라졌다. 이대로 눌려야 한다. 산에서 들에서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지만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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