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9 /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 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산 4 / 김광림 아침이면/ 눈을 부라리고 꽈리를 부는/ 짐승이 있다.// 터진 황금(黃金)의 풍선(風船)에서 흩어져 나온/ 은혜(恩惠)로운/ 한낮이다// 지루한 속앓이를 외색(外色) 못하는 진종일/ 부신 가루를 회수(回收)해다 환약(丸藥)을 빚고 나면/ 저녁이다// 장엄(壯嚴)하게 투약(投藥)을 받아 마시고는/ 잠이 드는/ 짐승이 있다.// 선과 연 / 김광림 젊었을 땐/ 좋은 일을 서둘러라/ -고/ 늘 들어 왔지만// 고희(古稀)의/ 이 나이엔/ 사랑은 서둘..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풀잎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
어머니 / 김종삼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았다/ 그것들 때문에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아우는 비명에 죽었고/ 형은 64세때 죽었다/ 나는 불치의 지병으로 여러 번 중태에 빠지곤 했다/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 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도 못 썼다고//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엄마 / 김종삼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묵화(墨畵) / 김종삼 물 먹은 소 목덜미에/ 할..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듯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버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도 허지, 그것을 안 맨들 양반이 아닌디 아닌디....../ 어리등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의 두 입술은 설핏 웃는 듯도 하였다/ 상자 속에는 버선 대신 삼베 두 조각이 들어 있어서/ 그걸로 잘 마른 장작 같은 두 발을 싸드렸다/ 삼베 두 조각을 두고/ 할머니는 왜 끝내 버선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 에 싸..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 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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