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벌판에 혼자서 서라 / 김용옥
눈 쌓인 벌판에, 백지와 대면하듯이 혼자서 서라. 막막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무 말도 못하다 보니 할말도 없는, 백지가 되라. 천지간에 어스름이 고양이 발걸음같이 깔리더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적막하게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아니고 싸락눈이 싸르락싸르락 소곤대는 것도 아니다. 구물구물 밤벌레 같은 눈이 시름없이 기어 내려온다. 강풍이 시샘하지 않으니 아장아장 하강한다. 하염없이 내린다. 백설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마음의 갈피에 꽂아 둔 누구인가, 그 사람에게 말 걸고 싶다. 설원의 새끼짐승처럼 겅중겅중 눈 속을 헤매고 싶다. 눈밭에 개 뛰듯 뛰고 싶다. 아뿔싸.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뭣, 뭣, 뭣을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는 일종의 허영. 삶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를 찢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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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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