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잘 들기 / 이화진우물쭈물하다 일흔 중반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대수명이 얼마인지 인공지능에 문의하였더니 여든여섯이라고 알려준다.매일 다섯 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하는 처지를 고려하면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대수명은 그렇다지만 남은 삶이 몇 해가 될지 가늠할 수 없다. 남은 삶을 보람차고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이십 대 중반에 직장에 들어갔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건 고졸 학력이 전부였다. 오십 중반까지 두 아이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느라 허리가 휘청거렸다. 아내는 몇 년간의 부업 외에는 주식, 부동산 투자 등으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나는 직장에서 ‘관官’으로의 승진을 바라지도 않았다. 재물욕과 명예욕을 내려놓았으나 참살이가 되지 못했다. 달리 ..
삼봉산(三峯山) / 왕신연 - 2026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작‘삼봉산’은 거실의 장식장 가운데 칸에 있던 수석 이름이다. 한탄강이 고향인 삼봉산은 수석이 취미셨던 아버지의 유품이다. 컴퓨터 키보드보다 작은 크기에 높이도 나지막한, 어정쩡한 회색의 매끄러운 이 돌은 움푹움푹 팬 곳이 많은 세 개의 봉우리를 갖고 있었다.화려한 자개장이 유행이었던 무렵, 아버지는 한탄강 변에서 돌을 골라 집으로 가져오셨다. 점점 모아온 돌들이 쌓여 갔다. 집안에 뭔가 놓을 만한 곳은 이미 모두 돌이 차지했고, 계단도 모든 칸마다 오른쪽 모퉁이에는 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오르내릴 때 조심해야 했다. 안 그러면 아버지의 돌들이 도미노처럼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질 테니까. 여러 종류의 돌을 설명해 주셨는데 그중에서 구멍이 있는 건..
낮술 / 이명지낮술을 좋아한다. 술시가 지난 어둠과 퀴퀴한 뒷골목의 왁자한 소음에 숨어 제 안의 서러움을 감추고 사람들과 부딪는 술잔도 때로 괜찮지만, 타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비겁함 말고, 당당하게 자신과 대거리할 수 있는 낮술의 발칙함이 나는 좋다. 문학적 은유가 배경으로 깔리길 원하는 내 낮술은 대체로 서재 다탁에서 벌이는 혼술이다.내 안에 장전된 채 발화되지 못하고 박제되어 있는 언어들을 쏘아 올리기 위해 웅얼거리는 시간, 그게 문학의 언어든 관계의 언어든 술판에 앉혀놓고 말을 걸어본다. 그때 언어는 다른 이의 입을 빌어 내게 오기도 하고, 남의 책 속에서 발화되기도 한다. 입안에 고여 말이 되지 않고 떠다니던 것들이 어쩌면 그리 매혹적인 결정체가 되어 남의 문장 속에 딱 박혀 있을까? 그 낭패감..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것 / 신효심 -2026 제11회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작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허리춤을 쥔 두 손에 힘이 풀리는 걸 알아차린 아빠가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웠다."지나가는 차 잡아줄 테니 타고 가. 아빠는 오토바이로 곧장 뒤따라갈게."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빠 오토바이 뒤에 타고 읍내에 있는 한국전력공사에 가는 길이었다. 전기 절약을 주제로 한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탔다. 장려상이었는지 우수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 등에 내가 기대고 내 등에 봄볕이 기대고 있었다. 가끔 그날의 졸음이 생각난다. 등은 따뜻했고 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다시는 안 졸게. 아빠하고 같이 갈래."나는 아빠의 허리춤을 꽉 잡았다.시상식 단상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얼마만..
거미의 집 / 문미숙 - 202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길 건너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평소에는 무심했었는데 번듯한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생각들이 복잡하다. 이십여 년 동안 베란다에 쌓인 짐들도 심란하다. 창밖 풍경을 밀어 올린 마천루 같은 새 아파트를 올려다보다가 베란다에 눈길이 머문다. 천장 구석에 풍장인 듯 버석한 거미 한 마리가 구석에서 대롱거린다. 거미의 몸피가 오래전 염을 했던 고모 같기도 하다. 바스러질 듯 형체만 남은 거미를 손바닥에 올려 바라본다. 제문을 소지하듯 창밖 바람에 실려 보낸다.고모네 집은 뒷산이 병풍처럼 두른 곳이다. 기와가 올려진 작고 오래된 집은 내가 태어난 곳과 지척이라서 내 어릴 적 추억은 고모 집 울타리 안에..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 / 송명화누가 여성을 꽃이라 했던가. 손바닥만 한 꽃이라니. 씩씩한 아름다움이다. 화개장터에서 데려온 주먹만 한 구근 하나에 이렇게 큰 세계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달포 넘게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꽃대 끝에 사방으로 커다란 나팔형 꽃을 세 개나 피웠다. 화피갈래 속을 들여다본다. 화판 아래쪽에서 뻗쳐 나온 삐침무늬가 빨간 치마폭에 대필로 친 댓잎마냥 거침이 없다. 파죽지세다.그 기운에 압도된 까닭일까. 말실수를 하였다. 단체톡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아마조네스’라고 알려주고 폰을 닫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버린 것이라는데 그래도 의외의 연상이다. 아마조네스라니?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용감히 다른 손을 내민 여전사..
막차 / 문경희출발 10분 전, 실내 조명등이 켜진다. 내내 굳건한 함구를 풀지 않던 슬라이딩 도어도 스르르 빗장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모든 것을 허용하겠다는 따뜻하고도 너그러운 호의에 감전되듯, 사람들은 하나둘 텅 빈 사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저 우람한 네 바퀴가 나를 인도해 줄지니. 한 시간 남짓, 언젠가부터 그에게 나를 맡기는 고요의 시간이 좋아졌다. 그를 무한 신뢰하며 무거운 다리를 쉬게 하고, 졸다, 깨다, 혼곤하게 정신의 풀기를 눕혀도 본다. 붉은 띠가 선명한 내 집행 시외버스의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에 동승하기 위해 나도 기다림을 추스르고 탑승구로 들어선다.모바일 승차권을 다운받는다. 본의 아니게 최근 들어 자주 도시를 오가다 보니 내가 애호하는 일인용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스마트하게 휴..
다시 천년 운람사 / 김상영ㅡ 2026 경상북도 이야기보따리 수기공모전 대상“불이야!”아랫집 본동 댁이 목청껏 외치는 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튀듯이 나와보니, 저 멀리 장터 쪽에서 꾸역꾸역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건조한 봄바람을 탄 마른 산등성이가 성난 사자의 갈기처럼 붉게 타올랐다. 화마(火魔)는 우우 소리를 내지르며 삽시간에 앞산마저 집어삼키며 거침없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살다 살다 이런 불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 터지면 이럴까, 평화롭던 시골 마을 모두가 우왕좌왕 정신을 놓았다. 하늘에는 산불 진화 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소방차들이 골짜기마다 비장하게 배수진을 쳤다.아! 그러나 인간의 사투를 비웃듯 바람은 방향을 바꾸었고, 그러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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