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제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가작) 입이 딱 벌어졌다. 사람의 뒷모습을 어쩌면 저리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편안한 모습이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김홍도의 염불서승도를 바라본다. 운해 속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 한 선승의 참선하는 뒷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삭발한 머리는 달빛에 파르라니 빛나고, 가녀린 목선을 따라 등판으로 흘러내린 장삼이 구름과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하늘은 난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스님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문득, 내 얼굴을 생각한다. “얼굴 좀 펴라”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다. 남들처럼 눈 코 입 하나 빠진 거 없는 외모이기는 하나 표정이 없어 그게 문제다. 아마도 삼신할미가 생명을 점지하고, 마지막 미소 한 줌 훅 뿌려주는 의식을 깜박하..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다칠세라 다루기에도 여간..

201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객주 문학관에 들어섰다.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많은 식솔이 먹고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

2016년 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머니는 큰오빠 곁으로 가기로 했다. 육십여 년을 살던 집을 비우자니 그만큼 더께가 앉은 살림살이가 자꾸 나온다. 부엌을 정리하니 막걸리 사발과 놋그릇을 비롯하여 뭉그러진 나무주걱, 아끼시던 꽃무늬 접시도 나온다. 낡은 장롱을 여니 맏며느리가 해온 상이불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다. 한 쪽에는 사십 대에 꽃구경 갈 떄 입었던 개나리색 한복이 걸려있다. 팔십이 넘고는 먼 길 떠날 때 가벼워야 한다고 조금씩 정리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그 물건에 담은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사는 묵은 시간과의 만남이다. 마당으로 끌려나온 물건은 버릴 것이 많았다. 구석 구석에서 나온 사소한 물건들을 붙잡고 눈을 맞추니 갖가지 이야기가 떠..

2016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
201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팡, 팡.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

바퀴 / 장미숙 2015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자전거가 푹 주저앉아 버렸다. 공사현장 옆 도로를 구르고 난 뒤였다. 뒷바퀴 타이어에서 쉭쉭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자전거가 묵직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땅을 숫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날카로운 뭔가 바퀴에 구멍을 낸 게 분명했다. 타이어는 벌써 바람이 다 빠져 버렸는지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굴러갈 때는 한없이 가볍던 바퀴가 끌고 가려니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수리점 아저씨는 손쉽게 자전거에서 바퀴를 분리했다. 바퀴가 분리되자 자전거는 순간 기능을 잃고 기우뚱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바퀴를 보고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아따, 요놈도 엔간히 힘들게 살아왔네. 너덜너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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