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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서((歲暮序) / 이장재

부흐고비 2008. 12. 29. 12:54

 

또 한 해를 보내며


사람은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 양육되고, 장성해서는 제 스스로 먹고 살며, 늙어서는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다. 이것이 변함없는 이치이다. 어릴 때에는 나를 돌보고 나를 보호하는 부모만을 오로지 의지할 수밖에 없어 부모에게 양육되지만, 늙어서는 근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다. 장성한 이후에는 반드시 사농공상(士農工商) 네 부류 백성의 하나로서 주어진 재능을 따라 학습하면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기를 수 있고, 입신양명(立身揚名)도 꿈꿀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빼어난 인물이나 한 지방의 준재를 넘볼 수도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제 스스로 먹고 산다는 말이다.

지금 나는 제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할 때에 있다. 그렇건만 성품이 원래 거칠고 못난 데다 의지와 기상이 엉성하다. 재물과 여색(女色)에는 무덤덤하지만 때때로 형세에 눌려 남들 하는 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물론 본래 성품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사농공상 네 부류의 직업을 힘써 배우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제껏 이뤄놓은 것이 없다. 한밤중에 베개를 베고 누워 생각하면 개탄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생에는 세 가지 썩지 않는 것이 있다. 가장 나은 것은 도학(道學)이요, 그 다음 것은 공적(功績)이요, 또 그 다음 것은 문장(文章)이다. 도학과 공적은 그보다 더 높은 것이 없다. 문장의 경우에는 비록 재능을 가진 자에 눌리기는 하지만 열심히 힘껏 배우면 세상에 쓰이기도 하고, 명성도 얻을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 나는 게으름이 아예 성품으로 변한 데다 품성 또한 엉성하다. 아침 저녁거리 죽조차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장만하지 못하고 집안사람에게 수고를 끼친다. 이야말로 옛사람이 말한 천지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이다.

아! 사람은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 양육되고 늙어서는 자손들로부터 봉양을 받는 것이 변함없는 이치이지만, 장성해서도 제 한 몸 먹고 살지도 못하니 세 번을 반성해보고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옛날에 감라(甘羅)는 나이 열넷에 제왕의 스승이 되었고, 손책(孫策)은 열일곱 살에 강동(江東) 땅을 평정하였으며, 등우(鄧禹)는 스물네 살에 공후(公侯)에 봉해졌다.1 모두들 세 가지 썩지 않는 것 가운데 한 가지씩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이 겨우 제 한 몸 먹고 사는 데 그쳤겠는가?

돌아보면 올해도 벌써 저물어간다. 스무 날만 지나가면 나도 서른 살이 넘는다. 옛날 뜻있는 선비는 가을을 슬퍼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월이 저물어가는 것에 느낌이 생겨나, 뜻한 바와 학업이 어긋나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슬퍼하는 글을 쓴다.

이장재(李長載)2, 〈세모서(歲暮序)〉, 《나석관고(蘿石館稿)》

  1. 감라는 진나라의 장군, 손책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군, 등우는 후한 광무제 때의 장군으로 모두 젊은 나이에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본문으로]
  2. 이장재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의 저자 李奎象의 아들이다. 韓山李氏 명문가 후예로서 학문이 깊었으나 큰 벼슬을 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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