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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자와 국화를 가꾸는 집

 

기국원(杞菊園)은 낙산(駱山) 아래 있다. 동서로 몇 길이며, 남북으로 몇 길이며, 그 넓이는 40여 칸의 집을 지을 정도다. 그 서쪽에 서재를 짓고 백천재(百千齋)라 하였으니, 대개 《중용(中庸)》에서 자신은 남들보다 백 번 천 번 더 한다는 말을 취한 것이다. 동쪽 대에 돈대를 쌓아 높이를 한 자 남짓 되게 하고 남산과 마주 보게 하였으니, 도연명(陶淵明)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면서, 여유 있게 남산을 바라본다.”는 시와 합치한다. 이 때문에 그 이름을 유연대(悠然臺)라 하였다. 앞뒤의 빈 땅을 개간하여 가로세로로 밭두둑을 만들었다. 구기자를 두루 심고 국화 수백 포기를 담장 아래 빙둘러 심었다. 담장 모서리에 벽도화(碧桃花) 한 그루를 심고 분매(盆梅) 하나를 두었으며, 물을 채운 옹기 둘에다 홍련(紅蓮)과 백련(白蓮)을 담아두었다. 다만 구기자와 국화가 가장 많기에 이 때문에 이름을 기국원이라 한 것이다. 기국원의 주인은 그 뜻을 스스로 이렇게 적는다.

나는 성품이 본디 어리석고 재주가 모자라며 기운이 매우 유약하고 우울증을 앓아온 지 오래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생에서는 시속과 맞추어 살아가기 어렵다고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외물 중에 좋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그저 맑고 한가하고 고요한 땅을 좋아하여 좇을 뿐이다. 다행히 도성 동쪽의 우리 집은 궁벽한 마을에 외따로 있어 먼지바람 일으키는 수레가 이르지 않는다.

이에 마음으로 이를 즐거워하여 이 기국원을 만들고 집과 대를 만들어 거처하고, 구기자를 밭에 심고 울타리에 국화를 심어 식품으로도 쓸 수 있게 하였다. 기국원이 매우 좁아 구기자와 국화 외에 여러 꽃이나 나무를 심을 수가 없다. 게다가 울긋불긋 요란한 꽃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맑고 우아한 운치를 취하여 옛 도인과 현자들이 마음으로 즐기던 것을 갖추고 사계절 볼거리로 준비하였을 뿐이다.

봄에는 벽도화를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연꽃을 볼 수 있으며, 가을에는 국화를 볼 수 있고, 겨울에는 매화를 볼 수 있다. 벽도화는 꽃 중의 신선이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며,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 매화는 아마 이를 모두 겸한 것이리라. 또한 내가 수천 년 후에 태어났으니 옛사람을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는데, 옛사람이 좋아하던 것을 보면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네 가지를 취한 까닭이다. 그러니 깊은 교분을 맺고 그윽한 회포를 의탁하여 날마다 그 곁에서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니, 비록 혼자 산다 하더라도 쓸쓸하다는 근심은 가져본 적이 없다. 꽃이 많아지면 그 뿌리와 잎을 치고 그 꽃과 열매를 따서 내 위장을 채우고 기운을 북돋운다. 몸이 편안하여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은 구기자와 국화의 영험한 효험이리라.

들어가면 방 한 칸이 훤하고 책이 벽에 가득한데 향을 살라 묵묵히 앉아 있노라면 속세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좌우에 쌓인 책을 낮에 읽고 밤에 사색한다. 방 바깥으로 나가면 구름과 산의 빼어남과 바람과 달의 자태를 높은 곳에 올라 둘러보는 사이에 다 얻을 수 있어, 유유자적하면서 내 마음에 맞는 대로 살게 되니, 이것이 백천재와 유연대에서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이곳에 서재를 두고 이곳에 대를 쌓고, 이곳에 꽃과 약초를 죽 심어두어 수양과 휴식의 장소로 제대로 된 곳을 얻게 되었으니, 바로 기국원의 공이다. 이로부터 즐거워하는 취향이 깊어지고 조용히 수양하는 공이 집중될 것이다. 다행히 병이 조금 나아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이는 주인의 소원이다.

어유봉(1672-1744),〈구기자와 국화를 심은 집(杞菊園記)〉《기원집(杞園集)》

 

국화_정조 _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해설 - 이종묵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어유봉의 호는 기원(杞園)인데, 자신의 집 이름 기국원(杞菊園)을 줄인 말이다. 기국원은 구기자와 국화를 심은 집이다. 당(唐)의 시인 육귀몽(陸龜蒙)이 집 앞뒤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어 놓고 살면서〈기국부(杞菊賦)〉를 지었고 소식(蘇軾) 또한 이를 의빙하여 〈후기국부(後杞菊賦)〉를 지었다. 이 글에서 소식은 “나는 이제 구기자와 국화를 양식으로 삼아, 봄에는 싹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으며 가을에는 꽃과 열매를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겠노라.”라 한 바 있다. 어유봉은 이 뜻을 따라 아예 자신의 집 이름을 기국원이라 하고 이를 줄여 기원(杞園)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기국원은 낙산 아래 있었다. 《중용》에서 “남이 한 번하여 잘하면 자신은 백 번을 하고, 남들이 열 번하여 잘 하면 자신은 천 번을 한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는 말에서 취하여 서재를 백천재(百千齋)라 하였다. 대를 짓고는 도연명의 〈음주(飮酒)〉시 가운데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꽃을 따면서, 유유자적 남산을 바라보노라(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유연대(悠然臺)라 하였다. 달빛 어린 오동나무라는 뜻의 오월헌(梧月軒)이라는 현판을 마루에 걸었다.

그리고 사계절 즐길 꽃을 심었는데 봄에는 신선의 꽃 벽도화, 여름에는 군자의 꽃 연꽃, 가을에는 은일의 꽃 국화, 겨울에는 이를 겸한 매화를 즐겼다. 이렇게 사노라면 마음에 흠모하지만 만날 수 없는 고인을 꽃을 매개로 하여 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선비가 꽃을 심은 뜻이다. 이렇게 살면 절로 마음이 겸손해질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어유봉은 집안에 가죽나무를 길렀다. 가죽나무는 목재로나 약재로나 아무 가치가 없다. 그래서 쓸모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저산(樗散)이라는 말이 생겼다. 어유봉은 가죽나무를 심어두고 《장자(莊子)》의 고사대로 쓸모없는 나무가 베이지 않는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조용히 살았다. 이렇게 마음의 평화를 누렸고, 여기에 더하여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효험이 있는 국화와 구기자를 먹었으니, 어유봉이 72년의 수를 누린 것이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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