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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공부
고인의 학문은 눈을 깜빡거리거나 숨을 쉬거나 말을 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늘 수양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음식을 먹고 의복을 입을 때에는 제도가 있지 않음이 없었다. 그릇이나 궤장에도 명(銘)을 새기지 않음이 없었고, 창과 벽에도 가르침을 적어두지 않음이 없었다. 누워있을 때에도 시신처럼 눕지 않았으니1 눕는 것도 법도가 있었다. 잠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았으니2 잠자리에도 보존하는 바가 있었다. 닭이 울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밤이 깊으면 잠자리로 든다. 하루의 시간을 계산하여 12시간 중에 잠시 꿈속에 있을 때를 제하고 나면, 대개 어느 시간인들 배우지 않을 때가 없고 무슨 일이든 배우지 못할 것이 없다. 마음을 다잡아 사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며 함양하고 성찰하는 것이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시작과 끝의 차이가 없어 지극히 잘 갖추어지고 지극히 치밀한 것이라 할 만하다.
맹자(孟子)에 이르러 다시 야기(夜氣)에 대한 논의를 펼쳤으니,3 이는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밤중에 얻을 바를 고찰하여 아침과 한낮에 잃어버린 것을 보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곧 앞서 말한 “잠시 꿈속에 있을 때”라 한 것 역시 무용하다 하여 버릴 수 있는 시간은 아닌 것이다. 그 후 하남(河南)의 정자(程子) 선생이 다시 맹자가 펼치지 못한 바를 펼쳐내었는데, 그 말에 “사람이 꿈을 꿀 때 그 보존하고 있는 바를 확인할 수 있으니, 꿈속에서 전도되면 이 또한 학문의 힘이 굳건하지 못한 것이다.”4고 하였다.
아, 맹자의 말대로 하자면 밤에 얻은 것을 가지고서 마음속에 보존하라는 것이요, 정자의 말대로 하자면 낮에 수양한 바를 가지고 꿈속에서 확인하라는 것이다. 낮에 보존해서 밤에 얻는 바가 더욱 많아지고, 꿈속에서 확인하여 낮에 수양한 바가 더욱 알차진다. 이에 잠자리에 눕든 일어나든, 꿈을 꾸든 깨어나든 그 사이에 서로서로 그 공부에 이르게 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고인의 학문 공부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 이르러 더는 흠결이 없게 되었다. 《논어》에 “심하다, 내 노쇠함이여, 나는 다시 꿈속에서도 주공을 만나보지 못하게 되었으니.”라 하였다. 어찌 공자도 또한 꿈을 꾸고 있을 때에 뜻한바 학업에 진전이 있는지 퇴보가 있는지, 도를 익힐 기운이 왕성한지 노쇠한지를 스스로 확인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저 꿈이라는 것은 원인에서 생겨나고 원인은 생각에서 생겨난다. 이 때문에 《주례(周禮)》에서 여섯 가지 꿈을 말하였는데 세 번째가 낮에 생각한 것이 밤에 꿈으로 나타난다는 사몽(思夢)이다.5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없으면 꿈에 망령된 것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 또한 그 이치가 분명하다. 나는 예전에 이를 확인한 적이 있다. 대개 내가 사는 집이 세 칸인데 침소와 마루를 두고 그 좌우와 전후에 모두 서적을 두었다. 나는 일찍이 자나 깨나 밤낮으로 그 안에 있었다. 성격이 소심하고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책을 읽으면 꼭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종종 그 생각이 어지럽고 기운이 흐려지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문득 눈을 감고 생각을 멈춘 채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도록 하였다. 눈을 감고 한참 있으면 잠이 오고 잠이 오면 꼭 꿈을 꾸었다. 꿈을 꾸면서도 또한 생각을 하였는데 생각을 하여도 터득하지 못하던 것이 종종 꿈속에서 터득되는 일도 있었다. 혹 꿈에서도 터득하지 못한 것을 꿈에서 깨어난 후 다시 이에 대해 생각을 하면 간혹 통할 때가 있었다.
내가 꿈속에서 터득하는 것이 이와 같기에 마침내 집 이름을 생각의 집 사헌(思軒)이라 하고 처소는 꿈의 집 몽소(夢所)라 하였다. 그 뜻은 공자와 맹자, 정자의 말을 가지고서 아침저녁 궤안에 기대 있을 때 참고하여 의지하고자 한 까닭이다. 예전의 이른바 달인(達人)이라는 사람은 천지를 하나의 큰 꿈으로 여기고 인생을 하나의 작은 꿈으로 여겼다.6 이에 멍하니 스스로 멋대로 처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음란하고 나태한 병이 서로 점점 엉겨붙어 고질이 된 채로 평생을 보내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저 천지의 성(性)은 오직 사람이 고귀한데 그 성을 다하여 천명을 안다면 비록 저녁에 죽더라도 꿈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까맣게 무식하면 팽함(彭咸)7처럼 장수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 사이가 모두 꿈일 뿐이다. 아, 내 나이 이제 스물여덟이다. 지나간 것은 겨우 한 번 꾼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앞으로 꿀 꿈 또한 까마득하게 끝이 없을 것이다. 세월은 쉬 가는 법이요, 의리는 다 탐구하기 어려운 법이다. 장차 깜깜한 어둠 속에 지내면서 깨어날 때가 없어 꿈속에서 생을 마치고 말지 않겠는가? 혹 꿈속에 있을 시간이 그 몇 년이 될 것이며, 또 꿈에서 깨어난 후 또 몇 년이 남을 것인가?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을 꾸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낸다면, 끝내 탁 트인 큰 깨달음을 얻을 때는 없을 것이다. 아아, 끝장이로다.
옛말에 지극한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였고,8 《서경》에는 고종(高宗)의 꿈에 “상제(上帝)가 나를 보필할 뛰어난 인재를 내려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또 “짐의 꿈은 짐이 점친 것과 맞았다.”고 하였다. 꿈을 꾸지 않는 이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꿈을 꾸는 사람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이 없고도 생각이 통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오직 성실함일 것이다. 내가 이에 느낌이 있어 글을 지어 몽소의 기문으로 삼는다.
임상덕(林象德),〈꿈속의 집[夢所記]〉,《노촌집(老村集)》
삼승조망(三勝眺望)_정선_아름다운 옛 서울(보림한국미술관) 인용
[해설] - 이종묵(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노촌(老村) 임상덕(1683-1719)은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글을 쓴 1710년 28세의 나이에 이조정랑에 올랐다가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으니 그 재주를 짐작할 수 있다. 장수하는 천재가 없듯이 임상덕 역시 37세에 요절하여 인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임상덕이 젊은 시절에 학문과 문학으로 높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천부적인 자질에다 그의 부단한 노력 때문이었다. 임상덕은 잠을 자고 꿈을 꿀 때에도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낮에 공부하고 잠을 잘 때 사색을 통하여 낮에 한 공부를 정리하고, 밤에 잠을 자면서 깨끗해진 마음으로 낮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임상덕은 이것을 맹자와 정자 등이 전수한 유학의 공부 방법으로 삼았다.
임상덕은 꿈에서조차 학문을 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방의 이름을 ‘사헌(思軒)’이라 하고 잠을 자는 처소를 꿈의 집 ‘몽소’라 하였다. 낮에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 중에는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많다. 고민하다가 꿈을 꾸면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꿈속에서 해결하지 못한 생각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생각을 하면 해결이 된다. 사색과 꿈을 공부의 두 가지 방식으로 삼은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이 허망한 꿈이라 하여 나태와 방종에 이른다. 지난 세월은 꿈과 같이 흘러갔으니 앞으로 다가올 세월 역시 자칫 하나의 꿈이 되기 쉽다. 이를 경계하기 위한 한 마디가 ‘성실’이다. 성실한 학문을 위하여, 임상덕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따와 서재와 침실의 이름을 새롭게 부여해보는 것이 어떠할지.
하나 덧붙일 것은 임상덕은 이 글을 동문의 선배 양득중(梁得中)에게 보내었고 양득중은 친절하게 첨삭해주었다는 점이다. 후학의 글을 수정해준 구체적인 양상이 보이기에 이를 소개한다. 양득중은 잠을 잘 때 시체처럼 눕지 말고 잠을 잘 때 말을 하지 말라는 대목은 논지의 전개에 방해가 되니 아예 “고인의 학문은 닭이 울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밤이 깊으면 잠자리로 든다. 음식과 의복에 법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하루의 시간을 계산하여 12시간 중에 잠시 꿈속에 있을 때를 제하고 나면, 대개 어느 시간인들 배우지 않을 때가 없고 무슨 일이든 배우지 못할 것이 없다.”라 수정하라고 하였다. 과연 그렇게 수정하면 의미가 간명하다. 그러나 문집에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임상덕이 수긍하지 않은 듯하다. 또 양득중이 정자의 말 앞 대목이 번잡하다고 충고하였는데, 이는 임상덕의 글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모두 삭제하였다. 또 “고인의 학문 공부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 이르러 더는 흠결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그러나 이는 정자의 말이 아니라 곧 공자가 남긴 말이다.”라는 글이 더 있었는데, 이를 삭제하라고 한 요구 역시 임상덕은 받아들여 삭제하였다. 고인의 글쓰기의 한 단면이 이러하였다.
- 《예기(禮記)》〈곡례(曲禮)〉에 “앉을 때는 키처럼 펼치지 말고[坐無箕], 잠잘 때 옆으로 눕지 말고[寢不側], 누울 때는 시체처럼 뻗지 말고[臥無尸], 놀 때는 걸터앉지 말라.[遊無倨]”라 하였다. [본문으로]
- 《논어》〈향당(鄕黨)〉에 “잠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았다.[寢不言]”라 하였다. [본문으로]
- '《맹자》에 \ [본문으로]
- 《이정전서(二程遺書)》에 “사람이 꿈속에서도 또한 자신이 공부한 바의 깊이를 재어볼 수 있으니, 꿈속에서 전도되면 곧 심지가 온전하지 못하고 다잡은 것이 굳건하지 못한 것이다.[人於夢寐間, 亦可以卜自家所學之淺深, 如夢寐顚倒, 即是心志不定, 操存不固.]”라 하였다. [본문으로]
- 정몽(正夢)은 편안하게 저절로 꾸는 꿈이요, 악몽(噩夢)은 놀라서 꾸는 꿈이요, 사몽(思夢)은 생각이 있어서 꾸는 꿈이요, 오몽(寤夢)은 잠깐 조는 가운데 꾸는 꿈이요, 희몽(喜夢)은 기뻐서 꾸는 꿈이요, 구몽(懼夢)은 두려워서 꾸는 꿈이다. [본문으로]
- 《장자》에 “꿈을 꿀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 알지 못하고서 꿈속에서 또 꿈을 꾸며 그 꿈을 해몽하기도 하다가 깨어난 뒤에야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크게 깨닫고 난 뒤에야 우리 인생이 커다란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라 하였다. [본문으로]
- 팽함은 은(殷)의 대부(大夫)로서 그 임금에게 충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에 빠져 죽었던 사람이다. 여기서 양생술로 800년을 산 팽조(彭祖)의 오기로 보인다. [본문으로]
- 《장자》에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잘 때는 꿈도 꾸지 않고, 잠을 깨어서는 근심도 없었다.[古之眞人, 其寢不夢.]”라 하였다. 원문에 이른 “지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至人無夢]”는 말은 문중자(文中子)가 한 말인데, 주자(朱子)의 글에 장자가 한 말로 인용되면서 오해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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