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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에스프레소

부흐고비 2010. 4. 21. 13:25

 

이코노미스트 에스프레소


요즘 웬만한 책은 1만2000원이 넘습니다. 2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에 시원하게 편집된 책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책을 보면 신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출판문화가 바뀌었습니다. 문자 생활이 경쾌해졌다고 할까요.

국내에서는 일간지나 주간지, 월간지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모은 책은 한 주제를 꿰기보다는 글 모음에 가깝습니다. 제가 읽은 바로는 영어 문화권은 반대입니다. 저자는 상당 기간 숙성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뒤, 책이 나오기 전에 매체에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해 소개합니다.

책의 두께는 책의 심도와 분명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책 한 권의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 1000매, 글자 수로는 20만자가 기본입니다. 이보다 적으면 책이 얇아집니다. 외형적으로뿐 아니라 내용도 얇을 공산이 큽니다.

한 주제로 20만자를 쌓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꾸준히 그 주제로 글자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고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다른 사람이 접하지 못했던 깊이를 만나게 됩니다.

이코노미스트 창간특집호를 냈습니다. 주간 경제지를 내고 웬 책 얘기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매거진이지만 책 한 권 분량이 들어 있습니다. 페이지 수로는 240, 광고 지면을 빼면 150페이지입니다. 저희 한 페이지엔 단행본 책보다 글자가 훨씬 많이 들어가는 거 아시죠. 값은 3500원밖에 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주제는 아니어도 깊이는 제법 됩니다. 서가에 두고 참고할 만 합니다.

기업가정신을 커버스토리로 앉혔습니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고 주저앉지 않으려면 아이들이 장차 희망을 적는 란에 기업가가 들어가야, 기업가정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걷혀야, 기업가정신을 가로막는 여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습니다. 저희는 기업가정신을 창조의 열정이라고 봅니다. 기업가 기질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치 뛰어난 작곡가에게 저절로 악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아이디어가 샘솟습니다. 물론 기질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추진력을 갖춰야 성공합니다.

과거엔 기업가정신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않은 가운데서도 기업이 활발히 창업됐습니다. 기회가 많았고 보상도 컸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든 이젠 기업가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와 관련한 편견과 오해를 걷어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성공적인 퇴장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겁니다. 미국은 많은 창업자가 기업을 키운 후 주식을 공개하기보다는 대기업에 매각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면 국내에서는 회사를 키워 비싼 값을 받고 팔면 ‘기업가정신 실종’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기업가정신이라고 할 때 사업을 벌여 시장에서 자리 잡도록 하는 단계를 가장 중시해야 합니다. 숲이 우거지려면 무엇보다 새로 나무를 심고 뿌리를 내려 자생력을 갖도록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기업 지분과 경영을 더 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은, 나무가 더 우람하게 자라도록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 달릴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죠.

혁신형 창업자가 성공적으로 퇴장하도록 하려면 대기업도 변해야 합니다. 대기업은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할 때, 그 분야에 이미 중소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면 계열사를 설립하기보다는 중소기업을 인수하는 쪽으로 검토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더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만, 다른 기사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국의 마이스터기업 6선’ 특집도 참고할 사항이 많은 읽을거리입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공동기획해 장인기업 6곳을 선정해 소개했습니다. 소재·부품업체들인데요. 원고를 읽다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이름입니다. 대금지오웰, 동남정밀, 선일다이파스, 영신금속공업, 이구산업, 제우스유화공업. 간혹 영어가 들어 있지만 그런 이름도 투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 기름에 절고 공구를 다루며 굵어진 손마디가 연상되는 이름입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제품은 예쁜 손에서가 아니라 거칠고 굵은 손에서 빚어지는 게 아닐까요.

문화 쪽 콘텐트 가운데 홍진호 서울대 독어독문과 교수의 글을 강력 추천합니다. 홍 교수는 20세기 교체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꽃피운 새로운 문화·예술 사조를 소개하며 그 배경과 계기를 파고듭니다. 새로운 사조의 주인공들을 몇 명만 꼽으면 언어철학의 대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로티시즘을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한 구스타프 클림트 등입니다. 홍 교수가 들려주는 진정한 혁신과 창조의 이야기에 빠져보시죠.

지금 가판대에 뜨거운 붉은 표지의 이코노미스트 1034호가 놓여 있습니다. 강렬한 에스프레소 맛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상큼하고 달콤하며 씁쓸한 맛도 물론 곁들였습니다.

백우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드림

출처 : 이코노미스트 (20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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