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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뿔 / 김동수

부흐고비 2018. 8. 14. 10:50

뿔 / 김동수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홀로아리랑'노랫말이다. 우리는 어째서 아리랑 가락에 실어 독도의 안부를 묻는 걸까.

어쩌면 너와 나도 생의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주먹만한 심장 하나로 파도를 헤치느라 통통거리다보면 누군들 나보다 더 따뜻한 가슴이 그립지 않겠나. 그래서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체온을 나누고 있을 게다. 이 땅을 부지런히 개간해 풍요로운 나라를 만든 지금, 우리가 독도의 안부를 묻는 건 단지 망망대해에서 홀로 바람을 맞은 섬이 안쓰러워서만은 아닐 게다.

이 땅은 2억 6천만 년 전 남반구와 적도 근처에 있던 섬이었다. 1억 4천만년 동안 북으로 유랑하던 섬들이 대륙의 동쪽에서 만나 등뼈를 세우고 갈비뼈를 뻗어 하나의 몸을 이루었으니, 지금의 한반도다.

밀림을 헤치고 사막을 건너 이 땅에 닿기까지 우리 선조들도 오래도록 유랑했다. 샘이 있어 메마르지도 나무가 있어 척박하지도 않아 콩 심으면 콩 나는 정직한 땅, 춥지도 덥지도 않아 성품도 온화한 땅, 사계절이 어김없이 순환하는 약속의 땅, 아침 해가 먼저 뜨는 이 땅에 우리 선조들은 뿌리를 내리고 자손만대 이어갈 나라를 세웠으니, 그 이름은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

개아재비, 며느리밥풀, 각시제비, 민들레, 풀 한포기까지 사람다운 이름을 붙인 우리 선조들은 마파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명주바람, 바람 한 자락까지 저다운 이름을 붙였다. 게다가 뫼, 가람, 바위 하나까지 다채로운 이름을 붙였으니, 산 수려하고 물 맑은 금강산을 푸른 물결 춤추는 여름에는 봉래산, 단풍 드는 가을에는 풍악산, 만가지 형상이 드러나는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정서도 자연을 닮은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의 이름도 지었으니, 그 이름은 금수강산(錦繡江山).

보물은 남의 손을 타는 법일까. 숱한 외침으로 문화유산이 불타고 정신문화까지 유린되었다. 빼앗긴 이 땅의 이름을 되찾으려 얼마나 많은 할아버지들이 피를 흘렸으며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군홧발에 짓밟혔는가. 또 이 땅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쇠말뚝이 박혔는가. 게다가 외세의 개입으로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벌어져 그 단절의 쇠사슬이 오늘까지 이 땅의 허리를 옥죄고 있으니, 어찌 이 땅의 안녕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우리 선조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소의 안부를 살폈다. 그러고는 밥보다 여물을 먼저 끊였다. 소는 날카로운 발톱과 뾰족한 송곳니 대신 발굽과 뿔을 가지고 있다. 초식동물에게 발굽은 나태가 아닌 근면을, 뿔은 공격이 아닌 방어를 상징한다. 우리 민족성을 닮아서일까. 평화, 온순, 공존을 성품으로 지닌 소는 단순한 길짐승이 아니었다. 이 땅의 정직한 걸음이었고 일꾼이었다. 더 나아가 자산이며 가족이었다. 선조들은 마당의 소가 안녕해야 집안도 안녕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모여 나라를 이루지만, 나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삼각은 영역을 이루는 최소 단위이며 삼각형은 가장 튼실한 도형이다. 나라는 사람, 영토, 주권이 삼위일체가 되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유기체, 말하자면 생물과 같다. 생물은 늘 외부의 위협을 받는다. 머리가 없거나 영토가 없거나 자아가 없으면 생물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일본은 틈만 나면 동해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엔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바꾸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중국은 북으로는 슬금슬금 동북공정을 진행해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조작해 훗날 일어나 간도 분쟁에 대비하고 남으로는 이어도 과학기지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자국 어부들이 백령도를 넘어 우리의 수산자원을 불법 남획해도 못 본 체하고 있다. 동서남북에서 우리는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말은 없지만 열두 가지 덕을 지닌 소에게도 뿔이 있듯, 이 땅에도 뿔이 있다. 북쪽엔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남쪽엔 하얀 사슴이 백록담에서 물을 먹는다는 한라산이, 서쪽엔 하얀 날개를 편 따오기처럼 생겼다는 백령도가 있다. 백의민족의 땅답게 하얀 이름이 붙은 이 산들은 대륙으로 뻗는 길을 지키고 바다로 가는 길을 지키고 황해를 지키는 뿔이다.

독도는 괭이갈매기, 섬장대, 박주가리꽃, 곰딸기, 슴새, 가막베도라치, 개미숭달팽이, 뜨덕새우, 보라성게, 일곱줄얼개비늘, 청큰뱀고동, 파람동, 개갓냉이, 겟메꽃, 괭이밥, 날개하늘나리, 마디풀, 왕해국, 큰개미자리 등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가진 희귀한 생물들이 사는 영토다. 흔히 '국토의 막내'라고 하지만 울릉도나 제주도보다 250만여 년이나 나이가 많은 섬이다. 키도 무려 2000m가 넘는 원뿔이다.

다양한 천연자원과 미래형 광물자원이 풍부한 동해와 독도는 잘 가꾸고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다. 풍요로운 나라를 만든 후손이라는 명예 앞에 천혜의 보고를 빼앗긴 후손이라는 망신을 붙이고서야 이 땅을 지키려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어찌 떳떳이 뵐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아침이면 동해를 지킨 용에게 안부를 여뿝고 마음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금수강산의 동쪽 옥토, 동해를 지키겠노라고.

동해엔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노라던 문무대왕의 혼이 용솟음치고, 독도엔 이 땅의 안녕安寧과 복福을 지키려던 안용복安龍福장군의 얼이 우뚝 솟아 있다. 해 뜨는 길을 지키는 용의 뿔을 잃는다면 아침의 나라에 평화로운 해가 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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