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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항 속의 서울 / 박연구

부흐고비 2019. 11. 2. 10:56

어항 속의 서울 / 박연구


高一짜리 딸아이가 창경원 연못에서 한 시간에 二백원을 주고 낚시를 하여 잡아온 붕어 다섯 마리를 어항 속에 넣었더니 제멋대로 유영(游泳)ᆞ곡예를 부려서 미상불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돈이 들고 기술이 따라야 하는 열대어 같은 건 길러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디에서나 손쉽게 잡히는 담수어(淡水魚)인 붕어쯤 하등 신경 쓸 일도 아니어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침 앞집에 우물이 있어서 딸들이 다투어 물을 갈아 주곤 해서 고기가 팔팔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보니 그 중 큰놈 두 마리가 죽어서 떴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아이 할아버지가 모르고 수돗물을 갈아준 탓이었다. 딸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원망하였다. 할아버지는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모양이신지 고기도 죽는 독약 같은 물을 우리가 마시고 산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시었다.

그 다음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우물물을 갈아 주곤 했다. 세 마리가 얼마 동안 잘 살아 있어서 그 후로는 어항 사정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보냈는데, 또 두 마리가 죽고 한 마리만 외롭게 남아 힘없이 유영(游泳)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물을 갈아 준 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단정을 하고 남은 한 마리마저 죽일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당장 새 물로 바꿔 주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 정성으로는 붕어를 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금붕어나 열대어도 아닌 시시한 물고기라고 해서 관심이 시들해진 탓이 아닌가 싶다.

물을 새로 갈아 주었을 때는 유난히 아가미를 벌룸거리며 활발하게 헤엄을 치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동작이 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다 물을 갈아 주는 것을 잊어 버렸을 때는 조금 충충해진 물속에서 붕어가 몹시 피로하게 보인다. 마치 탁한 공기로 해서 질식할 지경인 인간의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같은 서울의 지붕 밑이면서도 별로 공해를 느껴보지 못할 만큼 공기가 맑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동네여서 주위에 숲이 있고 새소리가 끊이지 않아 자연 동산이나 마찬가지다. 까치가 지저귀고 참새가 출근길을 전송해 주는 골목길을 걸어 나올 때는 발걸음이 가벼웁다.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루 일과를 문제없이 해치울 것 같은 의욕이 솟는다. 그런데, 막상 시내 쪽으로 달리면서 정류소마다 사람을 주워 싣고 박석고개를 넘어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차 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 되고 차도엔 차량이 붐비게 마련인데 스컹크처럼 꽁무니에서 내뱉는 매연으로 해서 서서히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녹번동을 지나 산골 고개를 넘으면 하늘의 색깔부터가 달라진다. 갈수록 집은 매연 속을 달리게 되는 셈이니 마치 포연(砲煙)이 자욱한 적진을 향해서 진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에 방불할 만큼 긴장이 된다. 빅톨 위고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살아간다는 게 곧 전쟁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호흡기가 약한 나로서는 정말 비장한 각오가 없고는 곤란하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사무실까지는 한참을 걸어야만 된다. 무슨 행사가 있는 거리처럼 항상 사람들의 물결이 넘실대는 길을 헤쳐 나가려면 스스로가 걷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려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에서도 읽었거니와 사무실에 당도하면 마치 강을 헤엄쳐 저쪽 언덕에 간신히 당도한 것처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버리고 만다.

창밖을 내다보아야 건너편 빌딩의 콘크리트 벽뿐 눈은 여전히 피로하기만 하다. 잠깐 다방에라도 앉았다 오면 기분전환이 될까 하고 다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따갑게 한다. 전축소리를 좀 줄이라고 하면 못들은 척하기가 일쑤다. 내가 불연자(不煙者)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방 같은 데서도 나이 어린 사람이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환기 시설도 잘 안 된 데다가 굴뚝연기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로 해서 나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우리 집 어항 속에 남은 붕어처럼 지쳐 버리고 만다.

돌아가신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일화(逸話)가 생각난다. 언젠가 상경을 했을 때 어느 분이 서울 와보니 소감이 어떠하냐고 묻자,「서울에 오니까 공기가 보인다」고 대꾸하더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보이는 공기를 안 보이는 공기하고 이따금 환기할 수는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면 몸뚱이는 파김치처럼 지쳐 있으나 마음은 그래도 고비 하나를 극복한 것 같은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다 친구와 만나 맥주라도 몇 잔 들이킨 후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다.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서면 차창 안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맛이 달라진다. 점점 우리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사이다 맛처럼 상쾌하다. 새물로 바뀐 어항 속의 붕어처럼 콧구멍을 벌룸거리며 북한산의 솔바람을 호흡하게 되면 나는 생활전선에서 개선하고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집에 들어서면 막내가 된 세 살짜리 아들 아이가 나를 제일 반겨 준다. 이놈의 재롱을 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귀여운 자식들은 어버이 눈에 비타민과 같다고나 할까. 그날의 피로가 가셔지고 내일의 생활전선에 활력이 되어 주었다.



∎ 창작 비평(이관희)

산업화에 오염된 도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오염된 모습을 어항 속의 고기에 비유하여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 산문수필 작품이다.
현대문학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수필의 개념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는 창작변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먼저 오염된 도시를 갈아주지 않은 어항 속의 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창작적이다.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목 정하기이다.
창작은 제목 정하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많은 경우 제목이 작품 전체를 창작작품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학창작에서 제목 정하기는 작품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울을 어항 속에 집어넣고 있다. 이것이 창작이고 창작적이다.
서울을 어항 속에 집어넣는 일은 시만이 할 수 있는 시적 창작이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바로 시적 창작이 창작인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동화나 희곡이나 다 마찬가지다. 시적 창작이 없는 문학은 창작문학이 아니다. 문학 뿐만이 아니다. 음악 회화 무용 등 모든 예술은 본질상 시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적 발상의 형상화 방법이 다른 데서 예술의 장르와 문학의 장르가 갈라지는 것 뿐이다.

만약에 이 작품이 그 제목을 '서울에 관하여'라고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산문수필보다 훨씬 창작적인 변화에 제한을 받는 에세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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