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가을 장미 / 하재열
《수필과비평》 2012.7월 신인상 수상작
골목길 담장에 가을 장미가 피었다. 지난달 중순 무렵에 한두 송이 눈에 띄더니 시월 중순이 되어도 많은 꽃이 매달려 있다. 마른 잎들은 바람에 서걱거리며 겨우 붙어 있는데 꽃은 제철인 양 피어 있다.
해마다 철 지난 장미가 담장에 피어 눈길을 끌었지만, 이내 시들어 버려 철없는 꽃이라며 지나쳤다. 올해는 한 달이 넘도록 긴 담장에 피어 있으니 느낌이 다르다. 어쩌면 늘 피었던 가을 장미를 무심코 지나쳤다가 이제야 백수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일 두어 번씩 오가며 마주치는 꽃이 자꾸 발길을 머뭇거리게 한다.
며칠 전, 한잔 술로 밤이 이슥해져 들어오다가 또 발걸음이 멈췄다. 달밤이다. 어스름 달빛을 받은 철없는 꽃들의 붉은 그늘이 밤하늘에 흩어지고 있다. 누구와 이별을 하였는지, 장미의 사랑이 흔들리고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슬픔이라고. 곧 찬 서리가 내릴 것을 알고도 굳이 피어보지 않으면 안 될 사연이 있을까? 정해진 갈 길이 싫어 가을바람에 까탈을 부리며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저마다 사는 일을 생각하며 걷는 길이다. 그냥 세월 셈도 해가며 어정거려야 할 나도 얼굴 내미는 길이다. 크게 영화 볼 일도 없을 성싶은데 수명이 자꾸 길어져 간다고 한다. 누가 장미꽃을 쳐다보며 남은 생이 겁이 나서 너처럼 철 지난 꽃을 달고서 누구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을까? 그 바람을 대신 들어주려 올해는 더 길게 피어 있나 보다.
지난 오월, 봄비가 지나가며 무성해진 초록의 담장엔 지천으로 붉은 장미가 피었고, 몇 군데에선 찔레꽃 무리도 하얗게 피었다. 숨 막힐 듯한 두 꽃의 향기에 취해 그때도 여기서 달빛 속을 서성거렸다. 찔레는 무엇이 그렇게도 그리운지 온 향기를 쏟아내며 밤을 물들이고 있었다. 장미와 찔레의 만남, 그건 사랑과 그리움이었다. 제 시절을 살고 갔으면서도 이 가을에 장미는 다하지 못한 사연이 있어서인지 속살이 드러난 담장에 다시 피었고, 찔레는 그리움이 사랑이 되어 붉은 열매를 맺었다.
가을바람은 내 마음을 추억 속으로 실어 나른다. 갈 길이 멀게만 보여 가을 장미처럼 다시 피어나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인다. 다가올 시간은 알 수 없는 일, 더구나 길동무 만나는 일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니 생각은 자꾸 지난 시절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 해맑고 까만 눈을 가진 초등학교 때의 옆 짝 여자친구, 나를 좋아했던 시골 마을의 그 아이, 중학교 때 통학열차를 매일같이 타고 다니며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흰 교복의 여학생, 정들었던 직장 동료들, 그리고 몇 번 옮겨 살았던 옛집의 골목길 사람들이 그립다. 그래도 이성이 더 그리운 건 자연의 섭리일진대 누가 허물하겠는가.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해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만날 수야 있지만 아니 만나고 사는 게 사는 길이라 한다. 설령 만난다 해도 장미처럼 철 지난 꽃을 피워보려는 나의 푼수 짓거리에 살포시 웃기라도 할 것인가. 이불 한쪽이 먼저 비는 날이 오면 남은 이는 긴 시절 보낼 일로 아득해하겠지만, 한세월 함께 꽃 피우며 보낸 짝이 서로 부대끼느라 색은 좀 바래도 묵은 향이 짙다.
그렇다. 넝쿨의 줄기만으로 긴 세월 보내기가 적적할지 모르지만, 다시 꽃 피우는 건 애잔한 일이면서 또한 철없는 장미의 노욕이다.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쉽지만 부질없는 반추이다. 찔레꽃처럼 제철에 멋지게 살면서 그리움도 안으로 삭이고 붉은 열매를 영글게 남기며 갈길을 가야 할밖에. 풀벌레 울음도 숨어버린 으스름 달밤의 가을 장미가 그래도 아름답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그릇 춤 / 하재열 (0) | 2019.11.30 |
---|---|
도시락 기다리는 노인 / 하재열 (0) | 2019.11.30 |
휴전선의 봄, 그 고무줄놀이 / 하재열 (0) | 2019.11.30 |
달인 / 김정화 (0) | 2019.11.30 |
장미 타다 / 김정화 (0) | 2019.11.30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