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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죄 / 김은중
출처 : [관조와응시], 인간과문학파 동인지, 인간과문학사, 2017


마광수1 교수에 대한 이 글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평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평론의 범주에 들어가려면 문학적 관점을 견지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 문학적 관점은 절반도 안 된다. 나머지는 기억을 더듬고 자료를 찾아 적은 것이니 글의 형식이나 내용으로 보면 어정쩡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마광수의 인문학적 천재성이 아니라 똑똑한 한 지식인을 두고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당동벌이의 관습을 발휘해 그를 어떻게 제거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참으로 무서운 사회인데, 마피아나 엘살바도르 갱단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마광수의 학문 세계, 그가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즐거운 사라]를 쓴 동기, 마광수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행동의 순서로 적어 나가겠다. (인물에 대한 존칭은 모두 생략한다).

1. 군계일학의 학문적 능력

마광수의 저작은 다섯 분야로 나뉜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을 쓴 것을 필두로 한 문학이론, 그가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해 활동한 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시작된 에세이, 문화비평, [권태]로 시작하는 장편 소설 등이다. 그의 에세이는 말 그대로 에세이이다. [윤동주 연구] 2005년판에서 문화비평으로 분류된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1991)와 [사라를 위한 변명] (1994)도 에세이이다.

이 가운데 마광수의 정수는 논문과 다수의 문학비평에서 발견된다. [윤동주 연구]를 필두로 하여, [상징시학[(1985),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1986), [마광수 문학론집](1987), 등을 출판했으며 약 10년의 휴지기를 거쳐 [카타르시스란 무언인가](1997), 시학](1997), [문학과 성](2000)을 출간했다.

[윤동주 연구]는 마광수가 1983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이다. 그는 이 논문으로 그해 8월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전인 1975년 <언어표현을 통한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 연구>라는 제목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단순히 한 연구자의 학위 논문이라는 의미 이상을 지닌다.

먼저 이 논문은 한국에서 윤동주를 다룬 첫번째 박사 학위 논문이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서 최동호 교수가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물의 심상과 의식의 연구: 김영랑·유치환·윤동주의 시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이 논문은 윤동주의 시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으로 보기 어렵다.2 따라서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한국 학계에서 윤동주의 시를 연구한, 석사 학위 논문을 제외하고, 첫번째 연구서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한 인연으로 연세대학교가 윤동주를 전가의 보도처럼 자랑하고 윤동주가 기숙했던 핀슨홀 앞에 1967년 윤동주 시비를 세웠고 최근에는 그곳을 윤동주 언덕으로 단장한다고 하는데 윤동주에 대한 연세대학교에서의 연구는 마광수를 제외하면 매우 초라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마광수가 아니었다면 연세대학교로서는 윤동주를 거론하기에 매우 쑥스러웠을 것이다.3

[윤동주 연구]에는, 비록 그가 1983년판이 아니라 2005년판에서 밝힌 것이긴 하지만,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 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혁명의 수단도 종교적 차원의 작업도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문학이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면서 문학은 서서히 인간의 의식을 변모시키는데 이 때 의식은 이성과 감성, 본능과 도덕이 합쳐져서 이룩되는 직각의 양태라고 말한다.4 이런 주장은 사회의 민주화, 남북통일에의 기여, 참다운 민족민중문학 등을 목적으로 한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민족문학 작가회의, 그리고 이를 계승한 한국작가회의의 목적과는 많이 다르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 볼 때 [윤동주 연구]는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이전까지 윤동주의 시에 대해 사람들은 저항의 격전장 또는 지식인의 유희 공간으로 해석했다. 이에 반해 마광수는 상징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부끄러움을 들추어냈다. 마광수는 윤동주의 작품들에는 “자연스럽게 표출된 상징적 표현들이 시의 기본적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한다.5 특히 [윤동주 연구]는 이후의 윤동주 연구에 모범적인 텍스트가 되었으며, 그가 이 논문에서 설명한 것들은 윤동주 시 세계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 되었다.

문학비평가로서의 마광수를 언급하는 까닭은 그의 문학적 본성은 순수한 차원에서의 문학비평에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몇 편의 논문이 있다.

먼저 1988년에 발표된 <한국 현대시의 심리비평적 해석>이 있다.6 이 논문은 심리주의 비평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한국 현대시 가운데 대표적인 열 편을 선정해 심리비평적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의 문학계는 현실에 뛰어드는 것을 첫번째 사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고 그러다 보니 문학에 대한 다층적이고 심층적인 연구에는 소홀했다. 특히 마광수는 이 논문에서 “예술작품은 성욕의 대상(代償)적 충족일 뿐 직접 충족은 아니며, 따라서 예술가란 사회적 규율에 의하여 욕망의 무제한적 충족이 곤란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작품으로나마 간접 충족, 또는 대리배설을 하는 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 이는 마치 그가 1989년에 펴낸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예고하는 듯한데 이런 연보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 특히 유아기의 성적 에너지를 주제로 해서 한국 현대시를 분석한 점은 매우 신선했다. 더욱이 당시의 한국 비평계에서는 프로이트를 다룰 역량이 미흡했던 점을 고려할 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프로이트 저서의 번역서 한 편 변변히 없던 시절에 이런 분석을 한 것은 한국 비평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1991년 6월에 발표한 <‘연민과 공포’에서 ‘질투와 선망’으로>8는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심리적 동인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연민과 공포에 한정해 말한 것에 더해 질투와 선망이라고 말한다.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겐 질투와 선망의 감정이 더욱 크게 관극심리, 또는 독서심리로 작용할 것 같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그는 이 근거로 “현대사회는 어쨌든 겉으로는 계급의 구별이 없는 평등사회이기 때문에, 질투심과 선망의 감정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9 특히 질투와 선망이 등장하게 된 계기를 그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의 발달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거의 연극은 시각적인 면보다 청각적인 면에 의존해 배우의 얼굴이나 의상보다는 대사에 의존했지만 드라마와 영화는 순간순간의 시각적 영상미가 주는 감각적 흡입이 더 중요하므로 관객들은 스토리나 대사보다도 주연 배우의 얼굴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그 작품이 재미있고 없음을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한다.10 이 논문은 매우 독창적인 수작인데, 그가 이 논문을 쓰게 된 매우 흥미로운 계기는 다시 설명하겠다.

2. 지식인의 이중적 자기모순을 비판

그러나 그의 이런 문학적 천재성은 1989년 5월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출판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어서 같은해 10월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내면서 사회적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소설 [권태]와 [광마일기]를 1990년 한 해에 낸 그는 1992년 문제작 [즐거운 사라]를 출간하면서 ‘외설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이런 글들을 씀으로써 결국은 대학교수라는 안온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로 스스로 걸어나간 셈이 되었다. 그는 [가자 장미여관으로] 책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장미여관’은 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여관이다. 장미여관은 내게 있어 두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나그네의 여정(旅程)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여관이다. 우리는 잡다한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의 정체를 숨긴 채 일시적으로나마 모든 체면과 윤리와 의무들로부터 해방되어 안주하고 싶은 곳―그곳이 바로 장미여관이다. 또 다른 하나는 ‘러브호텔’로서의 장미여관. 붉은 네온사인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곳, 비밀스런 사랑의 전율이 꿈틀대는 도시인의 휴식공간이다. (중략) 누구나 잘사는 사회, 누구나 스스로의 야한 아름다움을 나르시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한다. 일을 안 해 ‘희고 고운 손’을 질투한 나머지 모든 여성의 손을 ‘거칠고 못이 박힌 손’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신경질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모든 여성의 손을 다 ‘길게 손톱을 기른 화사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괴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노동’, 이를 테면 화장이나 손톱 기르기 등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노동에서 진짜 관능적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 또는 복지지상주의가 요즘의 내 신조라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체면과 윤리와 의무들로부터 해방되어 안주하고 싶은 그곳인 장미여관은 실제로 당시 연세대학교 앞에서 화려한 위용을 뽐내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러브호텔’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광수는 연세대 앞에 실제로 장미여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시절 장미여관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쾌락과 환락이 꿈틀대던 신촌의 현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상징하는데, 그가 글은 이렇게 적었어도 실제 삶은 가톨릭 신부처럼 살지 않았나 추측하게 하며, 그의 글의 의도가 무분별한 환락과 쾌락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논란의 중심에 선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시집이나 소설집이 아니라 그가 1991년 봄에 출간한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의 삶을 예찬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노동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 지식인의 부르주아 삶을 비판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오히려 부르주아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이중적 자기모순이 그들의 외침을 더욱더 공허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11

그는 지식인의 은폐된 이중성을 벗기고, 관습적 도덕의 가식을 벗기고, 보수의 권위주의적 위선을 벗기고 싶었다. “마 교수는 이 땅에 전인교육의 신화를 엮어온 기존의 상징체들, 즉 대학, 권위, 지성, 윤리, 교수, 학자적 양심 등의 의미작용에 더 이상 귀기울이기를 거부”12했다.

그는 지식인 사회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훈민문학(訓民文學)’의 기득권에 싸움을 걸었다. 1990년 1월에 쓴 글에서 마광수는 여러가지 잡다한 지식들을 수집,망라해서 작품 속에 담아 넣는 교양주의 소설을 비판했다.

교양주의 소설의 특징은, 내용 안에 잡다한 지식들을 저장해 놓고 있긴 하지만, 이렇다 할 작가의 인생관이나 우주관을 정면으로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13

마광수는 “교양주의 문학의 결정적 한계는 그것이 작가들로 하여금 회색주의적 보신주의의 입장에 서게 한다는 점에 있다”14고 말하면서 교양주의의 대표 작가로 이문열을 지목했다. 그는 이문열을 위시한 “많은 작가들이 교사적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교양주의 소설을 많이 생산해내고 있다”15고 지적했다.

그 뿐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한국의 문학인들은 ‘민중’을 부르짖고 ‘민중문학’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문장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는 양반문학이 갖는 품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민중문학에 대해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교수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이전투구식으로 교수가 된 사람들일수록 더욱더 권위를 가장하고 도덕을 내세우면서 공부와 사실보다는 명예욕의 충족에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많은 대학교수들이 윤리적으로는 전통 보수윤리의 옹호자로, 정치적으로는 적당한 진보주의자로 처신한다”16면서 7,80년대 대학교수들의 모습을 비판했다.

유신 때는 은근히 유신체제를 지지하던 사람이 10.26이 터지자 갑작스레 반골로 돌아섰고, 5공정권이 들어서자 다시금 순진한 양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6공이 시작되자 그 사람들은 또다시 열렬한 이데올로그가 되어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논리에 가담하였다.17

마광수가 의도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정신적 틀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권위와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노출된 주장을 펼쳤다.

아무튼 빨가벗고 싶군, 그래서 홀가분해지고 싶군
상식도 역사도 사랑도 벗어 버리고 싶군
그러려면 집이 좋아야 해 난방장치가 최고라야 해
돈이 있어야 해

돈을 벌어야겠군 빨가벗고 살고 싶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군
우선은 있는 옷 없는 옷 죄다 줏어 입고
평화도 도덕도 윤리도 모두 줏어 입고
돈을 벌어야겠군
(‘빨가벗기’ 중에서)

홀가분해지고 빨가벗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평화와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돈을 번다. 그건 플랜 B이다. 플랜 A는 상식도 역사도 사랑도 벗어버리는 것이다. 상식도 역사도 사랑도 벗어 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평화와 도덕과 윤리를 지킨다. 마광수가 말하려는 인생 속살의 진실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대중과 매스컴은 제목의 야함에 이끌려 마광수의 의도를 외면했다. 그래서 ‘아무도 똑바로 말해주지 않는 인생 속살의 진실’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가 가려던 길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두 개의 문장에 그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설명되고 있다.

이제는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 행복(또는 쾌락)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에서 오는 것일 뿐,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18

이제는 순수한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고 순수한 공산주의도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실용주의적 쾌락주의와 인간심리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 바탕을 둔 ‘실리주의’만이 필요하다.19

그는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 행복의 합일 그리고 실리주의를 추구했다. 그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외쳤던 말의 재현이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히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나무"이다.

그리고 마광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1992년 11월 초 구속됐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한달 남짓 남겨놓은 때였다. 그를 잡아 가둔 책은 일반적으로 [즐거운 사라]라고 말해지지만, 그가 비판했던 대상들이 주목했던 책은 [즐거운 사라]가 아니라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가 아닌가 한다. [즐거운 사라]는 단순히 야한 소설이지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한국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혁명적이고 불손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를 덮어 쓴 것과 같으며, 그를 잡아 가둔 세력은 아델모,베난티오,베렝가리오,세베리노,말라키아가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의 유일한 필사본을 몰래 읽자 이들을 살해한 호르헤 같은 인물들이 출현한 것과 같으며, 나아가, 그가 예수 같은 인물은 아니지만, 빌라도를 충동해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선 가야바와 같은 존재의 출현이다.

3. 마광수를 가둔 지식인들

마광수를 잡아 가두라고 명령을 내린 자는 당시 국무총리 현승종이었으며 그 명령을 검찰에 지시한 자는 당시 법무부장관 이정우였다. 이정우는 김기춘20의 뒤를 이어 92년 10월 9일에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니 아마도 국무총리로부터 받은 첫번째 명령이 마광수 구속이 아닌가 싶다. 이정우는 대법관을 지낸 뒤에 법무부장관을 하는 ‘백의종군’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관이 된 직후 대선을 앞두고 모든 선거사범을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밝혔으며 검사장들을 소집해서는 공직자의 정당 유착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서 초원복국집 사건이 일어났다. 현승종 총리가 재임 기간 중 한 유일한 일이 마광수를 가두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이정우 법무부장관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사대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씨는 교수라는 칭호도 없이 마광수씨로 불러야 한다”며 교수로서의 품위마저도 잃어버린 발언을 했다. 사실 이런 말은 동업자인 다른 대학의 교수에게 할 말은 아니다. 마광수가 시대를 횡행하는 거짓 이념을 비판한 것을 파악하지 못한 손봉호 교수는 최근들어 자신이 대표로 있는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에 이런 글을 발표했다.

이념 갈등은 한국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위기로 내몰고 있다……이제 한국의 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 우선 스스로 이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나아가서 그 거짓 의식의 실체를 밝히고, 그 ‘거짓’을 폭로해야 한다.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상대화가 지식인의 특권이자 의무가 아닌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광수 교수는 27년 전 불혹의 나이에 거짓의식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요강들을 말했다. 손봉호 교수는 마 교수보다 딱 두 배의 삶을 더 산 즈음에 슬로건만 내걸었다. 그렇다면 27년 전에 마 교수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를 읽고 목적에는 동의하나 방법에는 논쟁이 필요하다고 철학적인 언어로 말했어야 했다.

마광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늘어난다. 잘 잡아갔다”라고 말한 서울대 교수를 가리키며 다소 과격하게 이렇게 읊었다.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승만 때도
박정희 때도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출세한다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환영 받는다

박정희의 ‘재건 국민 운동’
전두환의 ‘삼청 교육대’
김영삼의 ‘도덕 독재’ 등등
통치자들은 언제나 도덕을 곁에 끼고 정치를 한다.

내가 ‘즐거운 사라’가 야하다고 잡혀갈 때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늘어난다, 잘 잡아갔다”
고 떠들어대던
어느 서울대학 교수는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여러 관변단체 장(長)을 지내며
출세했다
그는 지금 서울의 어느 대학
총장까지 하고 있다

그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놈들은
다 때려죽이고 싶다


이문열은 마광수를 두고 “여기서 굳이 마 교수를 소설가로 부르지 않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그가 어떤 공인된 절차를 거쳐 우리 소설 문단에 데뷔했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글은 중앙일보 1992년 11월 2일자에 실렸다. 이문열은 조선일보 1991년 5월 16일자에 드라마작가 이은성이 쓴 단 한 편의 소설 [소설 동의보감]에 대해 “한번 책을 펴자 하룻밤 하루 낮을 꼬박 바쳐 세 권을 내리 읽게 한 강력한 흡인력의 비결” 운운하며 극찬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은성은 어떤 공인된 절차를 거쳐 소설 문단에 데뷔하지 않았다. 이문열이 불과 1년 여 전의 이 일을 잊어버렸을리는 없을 것이다. 마광수는 장편소설 [권태]를 1989년 5월부터 12월까지 [문학사상]에 연재했다. 그는 소설로도 등단한 작가인 것이다. 이문열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1987년에 받은 ‘이상문학상’은 문학사상사에서 주관한다. 그는 문학사상사로부터 상을 받긴 했으나 문학사상을 지속적으로 읽지는 않은 것 같다.

서강대 교수 이태동은 “어떤 비정상적인 청소년이 이 책을 읽고 (사라의)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면 범죄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비정상적인 청소년이 친구, 베테랑,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들을 보고 영화 안에 있는 살인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면 그는 실제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공지영의 [도가니]를 복지시설 운영자가 반복해서 읽으면 복지재단을 도가니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이태동 교수의 이런 논리는 일제가 자행했던 이른바 예비검속과도 맥이 닿는다.

이태동 교수는 “여대생과 교수 사이에 성 관계가 학점의 흥정 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1 그런 원칙주의자 이태동 교수도 2017년 11월 어느 수필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돼서는, 당선작 없는 가작을 뽑으려다가 당선작으로 뽑은 뒤 시상식에서 심사경위를 말하기를 “수상자의 작품은 상을 줄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가작을 주려 했는데, 주최측에서 수상자가 있어야 한대서 할 수 없이 당선작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발설해 주최측,당선자,참석자 모두를 당황케 하고는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4. 똑똑한 것이 죄인 사회

연세대학교는 1심 선고가 난 즉시 마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당시 총장으로서는 자신을 둘러싼 학내문제를 덮고 싶었을 수도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자 1995년에 면직됐다. 1998년에 복직되었고 2000년에 다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마 교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냈을 때 조용했던 대학은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를 내자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젊은 교수의 일탈로 볼 수 있었지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대학의 ‘관습’에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연령으로도 우리 과 교수들 가운데 제일 아래여서 여러 가지 ‘충고’와 ‘간섭’에 지치게 되었다. 충고가 단지 충고로 끝나지 않고 어떤 명령의 형태를 띠기 쉽기 때문이었다. 내가 심약한 성격을 가진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교수로서의 ‘품위’와 ‘보수적 처신’이 누누이 강조되는 것도 상당한 고역이었다.22

교수들은 불쾌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을 향해서도 이렇게 외쳤다.

교수 재임명 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어야 하고 대학의 보직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보직교수를 완전히 없애라. 총장,학장을 제외한 보직은 직원이 맡으면 된다). 그리고 공정한 교수채용제도와 승진심사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23

학과 교수들은 마광수에게 잡문을 쓰지 말고 논문을 쓰라고 채근했다. 그렇게 해서 마광수가 쓴 논문이 위에서 소개한 <’연민과 공포’에서 ‘질투와 선망’으로’>이다. 논문이 탁월하자 교수들은 마광수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는 논문은 쓰지 말고 잡문이나 써라.” 마광수의 학문적 식견이나 세상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것은 학과 교수들도 내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마광수의 문제는 똑똑하다는 데 있었다.

대단히 이성적으로 보이는 교수들이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신임 교수를 채용할 때인데 신임 교수 채용에는 교수들 나름대로 대략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말 잘 듣는 사람을 뽑는 것, 둘째는 나보다 덜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발 과정에서 이미 교수들이 이성을 잃어 이런 원칙을 잘 지키지 못한다. 요즘은 좀 나아졌으나 대부분의 대학에서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난다. 교수들은 내게 유리한 사람을 뽑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데 사력이 이판사판으로 흐르면 제3의 인물이 어부지리로 채용되는 경우가 있다. 마 교수가 제3의 인물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여하튼 마 교수는 말도 잘 듣지 않았고 또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있는, 매우 똑똑한 교수였다.

필자의 선배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 대학이 참 좋은 학교야.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모교에서 모두 채용하고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바깥에서 교수하게 만들어서 백 퍼센트 취업을 달성한단 말이야.” 이 원칙대로라면 실력 있는 마광수는 모교로 건너오지 말고 홍익대학교에 그냥 있어야 했다. 특히 마광수에게 집요하게 시비를 했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은 시를 전공한 선배 교수였는데, 마광수와 그 교수는 박두진 교수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거기다가 교수 사회의 사적인 인간관계가 마광수에게는 없었다. 그가 복직했을 때 그를 집요하게 흔든 교수는 1년 후배였다.

대학이란 곳은 바깥에서 보기에 이성과 지성이 지배하는 매우 세련되고 멀쩡한 조직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수십년 이어진 관행과 관습, 이성과 지성이 구성원의 감정과 엮이면서 만들어내는 습성이 결합하면서 다양한 부조리와 부도덕을 만들어낸다. 사회는 대학을 신성시하고 대학이 사회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니 이런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고 대학을 믿는다.

대학교수들은 부조리와 부도덕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놀라운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다. 물론 정치인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어차피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이론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정당화된 결과물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의 관습은 교수들에 의해 정당화된다. 궤변도 정당화되면 관습과 이론이 된다.

1998년 5월 부교수로 복직한 마광수는 2000년 또 다시 쫓겨났다. 국어국문학과가 속한 문과대 인사위원회가 “학문적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며 부적격 재임용 대상으로 판정했다. 마 교수가 비판했던 재임용 제도를 악용해 교수들은 마 교수를 다시 쫓아냈다. 마 교수에게 들이댄 기준을 같은 학과의 다른 교수들에게 들이대면 살아남을 교수들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는 연구 실적이 없어서 임용된지 30년 가까이 조교수나 부교수로 있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는 정년이 보장되고 마광수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

마광수는 자신이 해임된 기간에도 여러 권의 문학이론서, 시집, 에세이집들을 냈다. 1997에 철학과 현실사에서 [시학]을, 1999년에는 ‘한국문학연구학회’가 펴낸 [현대문학의 연구] 12권에 <소설에 있어서의 일탈미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냈다. 그는 다시 해임된 뒤에도 학문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을 다시 해임한 이유가 학문적 능력의 심각한 결함이라는 것에 대해 그는 논문과 저서로 반증했다.24을, 2005년에 한국시학회가 펴낸 [한국시학연구] 14호에 <시적 상징의 형이상성 연구>를, 2005년에 한국문학연구학회가 펴낸 [현대문학의 연구] 26권 26호에 <현대시의 형이상학적 상징의 기능 연구>를 발표했다.">

그에게 학문적 결함이 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고 학과에서 그를 배척한 근원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연세대학교는 1960년에 교수와 재단 사이에 분규를 겪었다. 이 분규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채 덮였으며 1961년 가을부터 분규를 주도한 교수와 동참한 교수들은 퇴임당하거나 해임됐다. 쫓겨난 이들은 일류 교수들이었다. 후임으로 재단의 입맛에 맞는 교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광수가 재직할 때에는 그런 교수들로 채워져 있던 시기였다. 그들은 의도치 않게 채용된, 문재가 넘치는 마광수와 함께 하기가 힘들었으며 포용력도 없었다.

5. 자기모순에 빠진 사회

지식인 사회와 교수사회가 마광수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문인 사회는 침묵으로써 동조했다. 마광수가 음란물 제작 및 배포혐의로 전격 구속됐을 때 문인 200여명이 ‘문학작품 표현의 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 출판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을 뿐이었다. 그 발표문에서도 이들은 “마광수 소설의 문학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25

이 단서는 매우 모순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문학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마광수의 소설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음란물이 된다. 따라서 이런 성명서조차 낼 필요가 없다.26 20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문인들은 왜 성명서에 동참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문인들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문인들 입장에서는 마광수의 구속을 사필귀정쯤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마광수는 교양소설 뿐 아니라 민중문학도 비판했는데, “지금 한국의 문학인들은 ‘민중’을 부르짖고 ‘민중문학’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문장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는 양반문학이 갖는 품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대하소설과 같은 작가들의 물량주의를 비판했는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마광수의 이런 비판에 기분이 상했는지 문학인들은 그의 구속에 대해 애써 침묵하는 협량을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와 교수사회는 법원과 검찰의 시녀 역할을 제대로 했다. 반대의 해석도 가능한데 지식인들과 교수들이 검찰27로 하여금 마광수를 구속하고 기소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28 이렇게 본다면 한국사회의 지배자는 지식인이 되는 셈인데,29 이는 조선시대 이래 선비가 권력을 쥔 것으로부터 전혀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법조인들 역시 검사와 판사가 되는 순간 지식인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니 마광수 사건은 지식인의 허구성을 폭로한 지식인을 지식인 사회가 축출한 셈이 된다. 아래의 시는 그들에 대한 마광수의 관찰이다.

사라의 법정

검사는 사라가 자위행위를 할 때
왜 땅콩을 보지 속에 집어넣었냐고 다그치며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재판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어내려고 애쓰며
피고에게 딸이 있으면 이 소설을 읽힐 수 있겠냐고 따진다

내가 ‘가능성’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
또 왜 아들 걱정은 안 하고 떨 걱정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왼쪽 배석판사는 노골적으로 하품을 하고 있고
오른쪽 배석판사는 재밌다는 듯 사디스틱하게 웃고 있다

포증줄에 묶인 내 몸의 우스꽝스러움이여
한국에 태어난 죄로 겪어야 하는 이 희극이여


마광수는 문학을 두고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정의했다. 문학은 늘 기존의 도덕에 대한 도전이고 기존의 가치 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며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카치오, 세르반테스, 빅토르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호르헤 보르헤스 등 수많은 문인들이 그랬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리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리면서 그는 조선시대 이래 지식인이 갖고 있는 그러나 민중은 알지 못하는 비밀을 누설하고 말았다. 음란물 운운 하는 것은 마광수를 가두기 위한 명분일 뿐이고 기소장에 없는 실제 죄목은 비밀 누설이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막론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보수’라는 관습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이 마광수에 대해 내린 부도덕한 사형(私刑)이었다.

사회의 속살을 까발리는 것이었기에 지식인 사회의 그에 대한 축출은 매우 집요했다. 그것은 젊은 문학적,사상적 천재가 우리 사회의 문화 권력에 맞선 이단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제거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유서처럼 이렇게 적었다.

인생에 대하여

세상에 태어날 때
나는 슬피 울었지만
모두가 웃었고
세상을 떠나 죽을 때
나는 너무 기뻤지만
모두가 슬퍼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마광수는 슬펐을 것이다. 그를 사랑한 지인들은 슬퍼했겠으나 그와 대척점에 섰던 이들 가운데에는 그의 죽음을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변태나 광마로 기억해도 자신은 해탈하면 그만이라고 했으니 죽음 이후의 반응에 대해 그는 괘념치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친구 같은 선생으로 살다 가려던 그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한 아쉬움만 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쓴 ‘민중적인, 너무나 민중적인’ 시 한 편을 더 소개하면서 그의 말을 전하고 물러간다.

경복궁

경복궁 구석구석에는
얼마나 많은 정액과 애액이 묻어있을까

왕들의 음탕한 욕정은
산삼,응봉탕,살모사,녹용,해구신 등
백성들의 피땀을 빨아
정성들여 키운 정력에서 나왔겠지

어린 궁녀들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도
백성들의 피는 넘쳐 흘러
아직도 경복궁 주춧돌 사이로 흘러내린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없이 강산도 바뀌어
왕들은 죽어버려 백골조차 없지만
그 어린 궁녀들도 외로이 늙어죽어
불쌍한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렵지만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아직도 정액냄새가 난다 피냄새가 난다

조선조 이씨 왕족놈들의
그 탐욕의 냄새, 그 음흉한 냄새가 난다







♪영화음악 The Mission (1986) OST Gabriel's Oboe



  1.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는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35권이 넘는 저서를 쏟아냈다. 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꼬리표가 채 식기도 전에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구속당한다. [본문으로]
  2. 마광수 이전에 윤동주에 관한 글은 100여편 발표됐는데 이 글들은 대부분이 윤동주의 시 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3. 마광수 이외의 윤동주 연구자로 대표적인 인물은 송우혜 선생이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이며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며칠 간격으로 함께 옥사한 송몽규의 동생 송우규의 딸 송우혜는 1988년 [윤동주 평전]을 발표했는데, 이 책은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가장 권위 있는 책이다. 이남호 교수가 지은 [윤동주 시의 이해](2014)가 갈등을 주제로 해서 윤동주의 시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권영민 교수가 1990년대부터 윤동주에 대한 다수의 저술을 냈다. [본문으로]
  4. 마광수, [윤동주 연구], 철학과현실사, 2005, 14-5쪽. [본문으로]
  5. 마광수, 같은 책, 222쪽. [본문으로]
  6.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펴낸 [인문과학] 제59집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7. 한국 현대시의 심리비평적 해석, 83쪽. [본문으로]
  8.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펴낸 [인문과학] 제65집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9. ’연민과 공포’에서 ‘질투와 선망으로’, 168쪽. [본문으로]
  10. 위 논문, 174쪽. [본문으로]
  11. 마광수, 무엇이 ‘순수’인가,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민족과 문학사, 1991, 23쪽. [본문으로]
  12.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회, 마광수 구속의 핑계, [마광수는 옳다: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에 대한 보고], 사회평론, 1995, 138-9쪽. [본문으로]
  13. 마광수, 교양주의의 극복,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341쪽. [본문으로]
  14. 같은 글, 342쪽. [본문으로]
  15. 같은 글, 341쪽. [본문으로]
  16. 마광수, 교수, ‘정치적 눈치꾼’상(像),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125쪽. [본문으로]
  17. 같은 책, 교수, ‘정치적 눈치꾼’상(像), 125쪽. [본문으로]
  18. 같은 책, 무엇이 ‘순수’인가, 25쪽. [본문으로]
  19. 같은 글, 24쪽. [본문으로]
  20. 김기춘은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나고 두 달 뒤에 초원복국집 사건의 최고위급 인사가 된다. 이 사건은 부산의 초원복국에서 정부 기관장들이 모여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등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불법적인 사건인데 김기춘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모두 현직이었다. [본문으로]
  21. 1993년의 항고심에서 이태동 교수와 함께 마광수의 소설을 감정한 이는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됐다가 강제혼인 사실이 드러나 사퇴한 안경환 교수이다. 마광수와 안경환 두 사람의 죄를 대법원 로비에 있는 디케의 여신 저울에 올려놓으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궁금하다. [본문으로]
  22. 같은 책, 교수, ‘정치적 눈치꾼’상(像), 126쪽. [본문으로]
  23. 같은 책, 교수, ‘정치적 눈치꾼’상(像), 128쪽. [본문으로]
  24. 2000년 철학과 현실사에서 [문학과 성]을, 2005년 해냄에서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를, 2001년에 한국문학연구학회가 펴낸 [현대문학의 연구] 16호 0호에 <이육사의 시 ‘절정’의 또 다른 해석 [본문으로]
  25.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182쪽. [본문으로]
  26. 강준만 교수도 위의 책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본문으로]
  27. 가야바의 사주를 받아 빌라도의 역할을 신념을 갖고 이행한 두 인물은 심재륜과 김진태였다. 김진태는 채동욱의 뒤를 이어 검찰총장으로 재직했는데,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을 ‘스마트’하게 처리함으로써, 마광수를 기소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문으로]
  28.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원래 [즐거운 사라]는 1990년 월간지 [여성자신]에 연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것이 출판되자 마광수와 출판사 대표인 장석주를 잡아 가둔 것이다. [본문으로]
  29. 강준만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중 권력의 권위주의 이전에 지식인의 권위주의가 더 심각한 유일한 국가가 되게 했다고 말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19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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