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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금수회의록’ 신소설풍으로 / 중앙일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때는 기해년 섣달그믐, 해가 어스름하고 삭풍이 으스스한데 웬 난데없이 촛불을 켠 짐승 무리들이 공터로 모이더라. 현판이 걸렸거늘 ‘금수회의소’라 하고 그 옆엔 안건을 써 붙였는데 ‘통령 신년사 대토론회’라. 날짐승, 길짐승, 가축, 곤충 미물들 운집 중에 안경을 걸친 곰이 잠이 덜 깬 눈으로 연단에 올라 개회를 선언하는데 제법 형용이 단정하다.

◆ 곰=소인이 겨울잠을 자다 들으니 저 구중궁궐에 계신 통령의 신년사라. 내심 반가워 귀를 세웠는데 들을수록 마음의 동요가 일어 더 잘 수가 없었소이다. 점입가경이라, 우리가 기해년에 먹이를 찾아 온 산을 헤맬 적에 ‘주 52시간’ 경계령을 내려 일도 막히고, 새끼들도 벌집하나 찾기 힘든 세월을 보냈는데 통령께서는 살림살이도 소득도 나아졌다 하니 수풀 속 민심과는 너무 동떨어져 참담한 마음이오. 해서 이렇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으니 자유 의사로 할 말을 다 하시오. 그러자 인상이 말끔한 여우가 꼬리를 흔들며 연단으로 나온다.

◆ 여우=간사하다고 욕먹는 여우올시다. 간사(奸邪)도 지혜의 소산이니 소인이 지혜를 발휘해 통령의 윤음(綸音)이 왜 민심과 이반되는지를 따져 보겠소. 고위 관료들과 더불어 민생에 힘을 쏟은 결과 고용과 소득이 모두 나아졌고, 우리가 항상 우려하는 바 소득불평등도 고르게 좋아졌다는 게 윤지(綸旨)의 골자라. 농가, 어가소득이 4, 5천만 원을 돌파한 것은 보조금과 겸업 덕분이오만, 자산이 줄고 부채가 늘어난 이면은 함구외다. 또, 청·중년 실업이 먹구름처럼 암울한데 역대 최고 고용률을 기록했다 하니 울림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라. 나라 곳간을 열어 빈곤층과 노약층을 먹여 살린 건 분명한데 곳간을 채울 공장과 일꾼이 날로 피폐해지니 ‘포용성장’은 ‘포장(包裝)성장’이라. 주변 무리들이 숫자 놀음으로 통령의 사리판단을 가리니 ‘혁신적 포용국가의 틀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다’는 속 터지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외다. (손뼉소리 천지진동). 그 때 청랑한 소리를 내면서 허리는 잘룩한 벌이 날아온다.

◆ 벌=걸핏하면 침을 쏜다 해서 욕하건만, 나를 해치는 자에게만 그리하오. 나는 누구보다 부지런해서 ‘주 52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밤에라도 날아가 양식을 구하외다. 먹고 남은 걸 꿀통에 쏟으면 다른 이들이 먹으니 그거야말로 분배의 모범 아니겠소. 우리 같은 자영업자, 제조업자가 많아져야 포용도 가능하거늘, 세금에 최저임금에 사회보험에 비용이 날로 증가하니 어찌 날개를 조야로 움직일 수 있겠소. 태양광 반사 빛에 눈이 부셔 방향을 자주 잃거니와 산비탈 초목이 죽고 과실수가 말라죽으니 꿀 딸 곳이 마땅찮아 올해엔 새끼를 반만 쳤소. 생산자에게 짐을 다 씌우는 대신(大臣)들을 발견하면 독한 침을 쏘고 싶은 심정이오만 요즘 기력이 쇠해 침도 그리 효력이 없소이다. (좌중 침울). 독수리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의연히 연단에 날아오른다.

◆ 독수리=좌중 주목! 소인이 바로 혁신명장(名匠)이라. 그 넓은 초원지대를 두루 날아 먹이를 찾는 솜씨나, 공중에서 내리 꽂아 낚아채는 솜씨가 바로 혁신이오. 여러 동포들이 굶을 때에도 우리는 혁신 한 가지로 의연히 버텼소만, 문(文)정부 ‘혁신경제’란 멀리 문명국 CES박람회 입구에도 못간 것 아니겠소. 벤처 특구의 밤이 캄캄하니 유니콘 기업은 언감생심, 산야에 덕지덕지 세운 ‘관계자 외 출입엄금’ 팻말만 파해도 길짐승, 날짐승이 제각기 재주를 발휘하겠거늘. 게다가 4차 산업의 주일꾼들이 나처럼 공중을 날아 겨우 일군 성과를 정부가 한 듯 자랑하니 아예 만주나 시베리아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외다. 선거법, 공수처법, 예산안에 매달려 반년을 허송하고 4차 산업 필수규약들은 며칠 전에야 뭉텅이로 처리하는 국회의 비루함에 혀를 끌끌 찼지만 어쩌겠소, 우리 동포들에게 혁신 경륜을 전수하는 게 도리라 무장공자(無腸公子)가 될 수밖에. (좌중 환호). 그러자 개구리가 덜 잠깬 눈에 온몸을 떨면서 폴짝폴짝 나온다.

◆개구리=우리더러 ‘우물 안 개구리’라 놀려대는데, 경륜도 짧은 청와대 고관들이 양비대담(攘臂大談)하는 꼴에 비하면 우리는 한참 위라. 우리는 못 본 건 모른다 하여 분수를 지키거늘, 소주성이 틀려도 경제가 나빠도 기다려라 좋아진다는 게 거의 삼년 세월이라 나 같은 미물이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청와대 86책사(策士)들은 한결같이 ‘우물 안 개구리’라, 30년 전 식견으로 이 세상을 경영하니 통령이 경제 활력을 되찾겠다 해도 믿음이 갈 리 만무외다. 우리는 주제가 미약한 것은 알고, 관가 마당이든 미나리 논이든 상관없이 우는데 비문(非文)이니 친문(親文)이니 다툼하는 권문세가보다는 낫지 않겠소. 천박한 지식으로 천하만사를 알은 체 하고, 이념이 다르다고 경륜가를 내치고, 황소 고집에 촛불 타령이니 철지난 창가(唱歌)와 같소이다. (손뼉소리 짝짝).

그때 한쪽 구석에서 호랑이가 회장!을 소리치며 갈지(之)자 걸음으로 나온다. (다들 긴장).

◆호랑이=본원의 이름은 호랑인데 별호는 산군이올시다. 내가 흉포하다는데 하늘이 준 천성을 발휘할 뿐 외려 정의롭고 공정하다 하겠소이다. 내가 없으면 산중 질서와 윤리가 지켜지겠소? 나는 굶주릴 때만 먹이를 찾을 뿐, 질서를 존중하는 공정대장이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나보다 더 무서운 게 정치라 했소이다. 공정을 입에 달고 사는 정권이 지난 가을 체면을 구겼는데, 사간원 대간(臺諫) 조국이 불공정과 비리의 모범을 보인 것 아니겠소. 그 시비로 통령이 사사로이 ‘마음 빚을 졌다’ 하니 세인들 마음고생은 어디 가서 하소연하리오.

공정은 분수와 명예를 지키는 신독(愼獨)에서 나오거늘, 비리를 파헤치는 의금부도사가 무서워 포도청 장수들을 유배보내 수족을 자르니, 마치 앞문으론 호랑이를 막고 뒷문으론 승냥이를 불러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공수처법이란 호랑이 위에 포수를 두는 꼴이니 만약 포수가 권세가들에게 매수되면 어쩌리오. 인간 세상에는 실로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공정이 어려운 법, 내 명예 지키는 법과 경륜을 배우면 어떻겠소? (만장 박수). 그러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승냥이가 훌쩍 연단에 뛰어오른다.

◆승냥이=사악한 간물(奸物)을 두고 세인들은 승냥이 같다 하는데 억울하외다. 내 본디 이름은 늑대요, 한번 혼인하면 조강지처로 알고 평생 하는 의리가 원앙(鴛鴦)보다 낫고, 새끼 기르는 정성이야 사람에 댈 바 아니오. 통령은 동포의 부모이거늘, 임기 끝나고 잊히리라 하면 우리는 고아신세, 무책임의 극치라. 남북문제도 그렇소. 우리는 널리 나돌아 다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사정과 정황을 빠삭하게 터득하오만 말을 안 할 뿐이외다. 남과 북이 ‘생명공동체’라는 통령의 말에 십분 공감하는 바이오만, [동물농장] 나팔륜같은 북한 군주가 속종(내심)을 바꿨고, 북한 매체가 통령더러 소대가리 쌍욕을 퍼붓는 건 분통이 터지오.

그래도 통령이 날마다 개여울에 나가 굳이 잊지는 말라 애타는 터에, 미국통령 트럼프가 귀뜸도 않고 북한과 직거래하고 일본의 아베가 살살 중국에 접근하는 형세에 일편단심, 현하지변(懸河之辯)만 갖고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니, 금강산관광, 국제평화지대 같은 옛노래는 치우고 퇴역 외교관들을 다 모아 미.중.일이 옳다구나 할 책략을 내놓는 것이 재바르게 널리 돌아다니는 승냥이의 지혜라. 150년 전 [조선책략]을 참조하면 친미(親美), 결일(結日), 연중러(聯中露)가 맞는 판세라, 쓸데없이 고집하다 북풍.서풍에 휘말리고, 남풍.동풍에 본전도 못 찾을 판이니, 자주.반북 패싸움 그만하고 대소(大小) 책사를 불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실리를 기하는 게 급선무라. (박수 소리 진동). 이에 촛불도 다 타고 밤이 이슥해졌는데 한구석에서 입만 옹송거리던 쥐가 저요! 하고 외치더니 슬금슬금 연단으로 기어오른다.

◆쥐=저는 세인이 싫어하는 쥐올시다. 저더러 고상하게 ‘서선생, 서선생’ 하는데, 아무도 모르게 식량을 구하는 지략을 칭송하는 일리 있는 말이오. 우리는 양식을 모두 축내는 파렴치한은 아니외다. 본디 동양고사에서 우리를 현자(賢者)라고 부른 이유가 있소. 부처님이 상을 걸고 경주를 시킬 때 일찍 출발한 황소 등에 타고 먼저 뛰어내려 일등을 하였소. 황소가 억울해 한들 내 알 바 아니고, 남의 힘을 활용할 줄 알아야 생존하듯 각자도생은 어떠하오. 4월 총선 이후 대선까지 민심과 민생이 죽처럼 들끓어 정의와 공정은 만추 낙엽처럼 시들어 떨어질 터, 다음 정권에서 힘깨나 쓸 권세가 댁으로 이주할 계획에 마음이 벅차오. 우리가 다산성인 이유도 다 양식을 탐지하는 탁월한 후각(嗅覺) 덕분 아니겠소. 타고난 사교술과 자제력으로 보수.진보도 없고 오직 묘란(猫亂)과 사란(蛇亂)을 헤쳐 갈 협치만 궁리하니 이 어찌 정치꾼의 모범이 되지 않으리오. ‘경자년 새해가 밝았다’는 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나의 낙천성과 꼭 맞는 이유요. (사방 웅성대는 소리). 그러자 잠에 겨운 곰이 다 탄 촛불을 들고 연단에 오른다.

◆곰=다 옳으신 말씀이오. 이 숲속의 탁견과 세평에 감탄하였소이다. 세인들이 다 알아들었을 터인즉, 이것으로 고만 폐회하고자 하외다. 기록을 맡은 서사(書司) 염소는 잘 정리해두시오. (만장 박수). 그때 망을 보던 솔개가 급히 내려앉아 외치기를, 의금부 포졸들이 출동해 이리오고 있다는 소식이오, 불길한 예감이 드니 급히 돌아가는 게 옳겠소이다, 한다.

들짐승은 껑충거리며 뛰어가고, 날짐승을 푸득거리며 날아가고, 곤충 미물들은 왱왱거리며 흩어지는데 염소만 홀로 남아, ‘드루킹더러 SNS 도리질 치라할지 결정해 주사이다’ 중얼대니, 얕은 귀먹은 솔개 왈, ‘뭐, 돌싱이 SOS를 쳐? SOS는 요망(瞭望) 전령인 내가 할 일이지 웬 돌싱?’하고 핀잔을 주고 급히 망루로 날아가더라. 산야에 섣달그믐 적막이 괴괴한데 추(秋)씨 성을 가진 법부대신이 파견한 포졸들 횃불이 저 멀리 일렬종대로 올라오더라.


출처: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금수회의록 禽獸會議錄
* 1908년 안국선(安國善)이 지은 신소설



  1908년 황성서적업조합(皇城書籍業組合)에서 출간하였다. 1909년 언론출판규제법에 의하여 금서 조치가 내려진 작품 중 하나로, 동물들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한 우화소설(寓話小說)이다. 서언(序言)에서 화자(話者)가 금수의 세상만도 못한 인간세상을 한탄한 뒤, 꿈속에 금수 회의소에 들어가 그들의 회의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금수회의의 개회 취지로 이 세상 인간들의 부패함을 언급한 뒤, 사람된 자의 책임, 사람들 행위의 옳고 그름, 현재 인류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려낼 일을 논의하자고 제시한다. 제 일석에서는 반포지효(反哺之孝)를 들어 까마귀가 인간들의 불효를 규탄하고, 제 이석에서는 여우가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들면서, 현재 세상 사람이 외국 세력을 빌려 제 동포를 압박하는 것과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빼앗는 것 등에 대해 비난한다.

제 삼석에서는 개구리가 정와어해(井蛙語海)를 들어 분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규탄하며, 제 사석에서 벌은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써 사람의 말과 마음이 다른 표리부동을 비난하고, 제 오석에서는 무장공자(無腸公子)로써 게가 사람들의 썩은 창자 및 부도덕을 풍자한다.

제 육석에서는 파리가 영영지극(營營之極)으로써 인간이란 골육상쟁을 일삼는 소인들이라고 매도하며, 제 칠석에서 호랑이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로써 탐관오리 및 험악하고 흉포한 인간들을 비난한다. 제 팔석에서 원앙은 쌍거쌍래(雙去雙來)로써 문란해진 부부의 윤리를 규탄한다. 그리고 폐회에서 이들의 말은 모두 옳게 긍정되고, 화자는 이를 듣고 인간의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는 이야기이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짐승과 곤충들이 개화기 당대의 인간사회를 비판하고 인간의 행위에 신랄한 규탄을 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로 불효·사대조성·부정부패·탐관오리·풍속문란 등 사회나 가정의 풍속적 타락에 대한 비판 외에도, ‘외국 사람에게 아첨하는 역적놈’이나 ‘무기로써 남의 나라를 위협하여 빼앗는 불한당’과 같이 외국을 규탄함으로써 당시 일본 침략의 위기에 대한 민족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모두 강렬한 주제의식에 지배되어 연설적 토로 이상의 소설적 형상화가 미흡하지만, 우화소설이나 몽유록 양식을 차용하여 개화기의 당면 과제였던 개화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명제를 함께 수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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