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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다 / 손광성

부흐고비 2020. 2. 18. 21:37

바다 / 손광성


바다는 물들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품 안에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 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칼로 허리를 찔려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지도 위에서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는 바다는 무엇에 대한 자신의 군림君臨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물며 모든 것은 평등의 수평선 위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더럽혀졌지만 아직 바다는 그런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어부들은 그물을 던지지만 고기만 넘겨줄 뿐 바다는 언제나 그물 밖에 서 있다.

바다는 두 손으로 뭉쳐도 뭉쳐지지 않고 잘라 내도 조그만 술잔 하나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규정되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길들이기를 거부하는 야성.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단지 하나의 과정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다는 언제나 뒤척이고 한숨짓고 몸부림친다. 상승과 추락, 승리와 패배, 욕망과 좌절, 그 두 사이를 일상의 우리처럼 반복한다. 밤마다 고민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다.

바다는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가식과 허세로 장식하지 않으며 가면을 벗고 순수를 드러낸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처럼 그 앞에서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우리를 흥건히 적시는 끈끈한 체취, 햇빛에 번뜩이는 윤택한 피부, 그리고 언제나 출렁이는 풍만한 젖가슴, 한 번도 손상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또 그러할, 저 관능의 출렁임이 언제나 우리를 부른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바다는 시작한다. 바다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길이요 가능성이다.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태초의 말씀이요, 얼굴을 가린 종교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눈물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지를 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도망자들이 찾아가고,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가고, 까닭 없이 가슴이 답답할 때 우리가 찾아가는 바다. 바다는 물 한 모금 주지 않고도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준다. 우리의 수척한 어깨를 그의 부드러운 어깨로 감싸 안는다.

삶에 대한 회의 앞에서는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로 대답하고, 사랑에 대한 의문 앞에서는 퍼렇게 멍든 가슴을 헤쳐 보이다가도 그리움 앞에서는 아득한 수평선으로 물러나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다.

사람보다 먼저 취하고 삶보다 먼저 깨는, 슬픔의 눈물만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까지를 함께 한 그는, 모든 만灣과 항구와 운하를 가득 채우고도 오히려 넘친다. 때로는 맹수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절벽 같은 해일이 되어 인간의 노작勞作들을 한순간이 쓸어버리지만, 그것은 악의에서라기보다 인간이 자랑하는 그런 것이 얼마나 공허하며 또 얼마나 소소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설혹 바다가 인간이 이룬 모든 것들을 무화無시켜 버린다 해도 우리는 성낼 것이 못된다. 바다로부터 건져 올린 그 많은 전체에 비한다면 우리가 잃은 것이란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도 무게도 잴 수 없는 하나의 물방울이면서 모든 물방울인 바다. 어린아이의 조그만 손에 의해서도 가끔 가볍게 들릴 줄 아는, 꿈과 화상을 함께한 동심의 바다. 그러나 영리한 바보들은 그것을 모른다.

여덟 살 때 내가 본 최초의 바다는 하나의 경이驚異였다.

스물이 되었을 때 바다는 어느새 늘 함께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다시 나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는 그의 품 안에 나의 존재마저 말없이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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