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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산하나 강하나 / 정목일

부흐고비 2020. 2. 24. 10:42

산하나 강하나 / 정목일1


나는 산을 하나 갖고 싶네.
옛날 사람의 아호를 보면 태백산인(太白山人), 지리산인(智異山人)이라 하고, 편지글 끝머리에 산 이름을 적고 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사찰의 이름도 산 이름을 내세운다. 산이 많은 나라에 사는 한국인의 삶은 하나의 산 영역에 속해 있음을 느낀다.
나도 산을 하나 갖고 싶네. 오랜 세월에도 푸른빛과 기상을 잃지 않고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산을 갖고 싶네. 산을 품고 살면 침묵을 알고 순리를 깨닫게 되리라.

무슨 산인(山人)이 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산처럼 청청해야 하고 고고해야 한다. 그래야만 산이 마음을 열어 받아 주리라. 산의 제자가 되고 백성이 되기 위해선 산의 마음과 모습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에 산이 있어야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싶네.

나는 강을 하나 갖고 싶네.
들판과 대지를 적시며 생명의 젖줄이 되고 어머니가 되는 하나의 강을 품고 싶네. 만년을 흘러도 마르지 않는 강물을 맞아들였으면 하네. 강물이 흐르면서 남겨 놓은 흰 모래밭을 가졌으면 좋겠네. 바람에 흔들리며 사운 대는 대밭을 가졌으면….
하나의 강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깊어지면서 맑아지리라. 이기에 묻은 먼지, 탐욕에 찌던 때, 아집에 생긴 얼룩을 씻어 내리라 싶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근심과 슬픔도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강물은 마음을 정화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물은 생명의 원질이고 어머니가 아닌가. 생명체의 순환과 순리를 보여준다. 가장 낮은 데로 흐르면서 뭇 생명체의 젖줄이 되고, 땅에서 하늘로 오른다. 자유자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자체가 생명이며 영원이다.
강을 가슴에 품고 살면 메마르지 않는 삶이 되리라.
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에 흐르는 삶이 되고 싶네.

나는 들판을 하나 갖고 싶네.
농부가 아닐지라도 가슴에 들판을 하나 품고 싶네. 오곡이 자라는 들판 길을 걷길 좋아하네. 살고 싶은 집은 들판이 보이는 숲속의 작은 집이면 하네. 들판의 모든 나무와 풀들, 벌레들, 새들과 눈 맞추며 마음을 나누며 살길 원하네.
들판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삶과 친숙하길 바라며 온전히 햇살과 바람과 이슬과 별빛을 맞으며 지내고 싶네. 가슴에 들판을 품으면 삶도 풍요해지리라. 들판의 노래와 말을 들으며 살고 싶네.

들판에 서면 한 톨의 씨앗이 되고 싶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대지에 안기고 싶네. 햇빛과 물을 맞아 들여 꿈꾸며 싹트고 싶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싶네.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이며 순정한 빛깔과 향기로 채워놓고 싶네.

돈으로 산 것은 진실한 소유가 아니다. 종내 모든 소유물은 사라지게 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걸 알면서도 왜 연연하는지 모를 일이다. 진실한 아름다움은 돈으론 살 수 없다. 가슴에 품어야 한다.
산의 풀꽃이 되고 강의 조약돌이 되고 들판의 한 줌 흙이 되고 싶네.

나는 움직이지 않고 변화무쌍한 산을, 마르지 않고 깊어가는 강을, 생명의 숨결과 빛깔로 넘실대는 들판을 갖고 싶네.

  1. 서정 수필의 대가 정목일은 194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월간문학』에 수필이 당선되었고, 1976년 『현대문학』에 수필 추천을 완료하였다. 남신문 편집국장, 경남신문 논설실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현대문학수필추천작가회 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한국문협 수필분과 회장 및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계간 수필 전문지 『선수필』을 발행하고 있다. 1995년에 현대수필문학상을, 2005년에 제1회 GS에세이문학상 본상을, 2007년에는 제44회 한국문학상, 2008년에는 제1회 경남수필문학상을, 2009년에는 제2회 조경희 수필문학상과 제2회 문신저술상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남강 부근의 겨울나무』,『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만나면서 떠나면서』,『모래알 이야기』,『달빛 고요』,『깨어 있는 자만이 숲을 볼 수 있다』,『대금 산조』,『별 보며 쓰는 편지』,『가을 금관』,『마음꽃 피우기』,『실크로드』,『침향』,『마음 고요』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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