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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평선을 / 김남조

부흐고비 2020. 2. 29. 10:51

그 수평선을 / 김남조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할 만큼 둘은 한 가지 색조에 풀어져 시야의 끝머리에 가로누워 있으리라, 그 꿈 속 같은 광경을 능히 현실인 듯이 상상해 낸다. 한 필의 연이은 비단 피륙처럼 머리 위 공중에서 아슴푸레한 저편까지 거대한 포물선을 그으며 높이 멀리 이어져 있을 그 수평선을.
눈에도 굶주림이 있어서 오랫동안 못 본 것에게 목마름을 탄다. 언제쯤 수평선을 봤던가 싶게 그 기억을 떠 올리기 조차 어려운 지경에서 나는 오늘 불현듯 치받는 충동에 겨워 간절히 바다 생각에 집중한다.
삶의 영광이여!
언제나 생각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주변엔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종교와 자연과 예술만 하더라도 이에는 제약이 없고 특권자도 없으며, 원하는 이가 원하는 만큼 누려도 좋은 전적인 허용만 있을 뿐이다.
어려운 시대, 삭막한 감정들에 기름 바를 자연과 식어 가는 심장의 피를 데워 줄 예술심과 그리고 만유 위에 계시옵신 조물주 하느님,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혼자 있으되 혼자가 아니며 쫒겨난 듯이 마음 추운 날에도 깊고 달가운 위안의 악수를 받곤 한다.
산의 장쾌함과 바다의 무량함도 기실 위대한 관현악 안에서 호흡을 맞추는 악기들 같이 서로 도와 완미한 조화에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바다에 가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 오늘도 역시 그 수평선은 유순한 양떼들처럼 드러누워 느리고 유장한 심호흡을 하고 있으리니 그 맥동 가히 손에 잡히는 듯하다. 거기에 선 사람의 지친 몸도 커다란 요람 속에서처럼 포근히 쉬게 될 것임을, 천천히 흔들어 주는 손길로써 온갖 긴장과 피로를 만져 치료해 줄 것이리라.
수평선이 보고 싶다.
배를 타고 한 없이 바다 위를 흘러가면서 바다와 하늘이 마주보는 광활한 공간 안에 안기고 싶다. 하늘 청청, 바다도 청청, 그 풍경을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씻어주고 새롭게 해줄 거대한 세척장.
바다와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것일까? 산울림 같은 것일까? 육지에는 하늘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데 물 위에 언제나 선명히 피어오르는 하늘의 그림자가 있다. 작은 호수거나 허리띠처럼 가늘고 긴 실개천이나 심지어는 두메의 우물 속에도 하늘은 고요히 내려 잠기어 그림자를 지운다.
석양머리엔 화선지처럼 선주왕의 염료가 번지고 서서히 은자로 바뀌었다가 다시 수묵색으로 갈아입은 빛깔들의 층계, 밤이 되면 순금 빛 불티를 뿌리는 억천만 개의 별들까지 고스란히 물 위에 얹히는 그 놀라움이라니!
비단실 스치듯이 미풍이 지날 때도 섬세히 그 모습 비추는가 싶은, 그토록 영롱한 명경, 바다여! 바다여!

하늘의 거울로 생겼는가
하늘의 산울림으로 생겼는가,
바다여.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나는 이는 약속처럼 수평선을 바라본다. 둘이, 셋이, 더 여럿이, 모두 다 수평선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사막의 모래 언덕인 양 이 또한 가도 가도 새로운 수평선이 눈 앞에 펼쳐지며 한도 없는 그것을.
그 영원한 반복, 지금 막 창조된 듯 청신한 수평선이 한 꺼풀씩 새 빛깔을 갈아입는다. 지구는 둥글다 하니 천 년, 만 년을 돈들 끝이 있으랴. 새로이 솟아나는 수평선인들 진실로 다함이 있으랴.

나는 바다로 가야지
외로운 바다와 하늘을 보아야지
내가 원하는 것
키 큰 배 한 척과
일을 인도할 별 하나 뿐.

수려한 바다의 시 한 구절을 읊어 본다. 바다는 외로운 곳인가, 하늘도 외로운 곳인가, 천지 만물은 다 외로운 것인가.
바다의 광막함, 산과 하늘과 그리고 사람의 영혼 속 구 무변광대함을 잠시 묵상한다. 그러나, 이는 비어 있는 성질이 아니고 꽉 차서 넘치는 그 성질이다. 자유로운 비상을 위하여 비워 두는 허공, 이 만큼 헐거운 테두리 안에서만 비로소 안주할 우리의 영혼이어니.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의 전기에는 그간의 고뇌스럽던 연애를 청산하고 여객선에 몸을 실었을 때 거기에서 무애의 상명한 바다를 보았으며 가슴 속 폭탄처럼 터지는 감격의 소용돌이를 이로써 경험했다고 말해 주고 있다. 힘과 깨달음과 새로운 영감이 분출해서 만감의 눈물을 흘렸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람을 회생시키는 바다, 아름답게 약동하는 새 활력의 바다라 그를 품속에 껴안고 그간의 모든 상처를 고쳐 주었음이리라.
바다의 모성, 그러면서 때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맹위와 잔혹을 불 지르기도 한다. 군함을 침몰시키는 바다, 도시 위를 덮치는 바다, 산 사람을 삼키는 바다 등등.
언젠가 제두도의 서귀포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을 때 나는 수시로 바다 기슭에 나가 앉았었다. 저녁나절 수면을 굽어보고 있으면, 무섭게 끌어당기던 그 사나운 힘. 그 바다 나직이 나에게 말했었지.

들어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나의 중심까지 부디 오너라
나는 간절하다고.

결결이 꿈틀거리는 검은 물이랑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물속에 떨어지고 싶고 하마터면 떨어지려고만 하는 묘하게 다급한 충동이 치받아 올랐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황포한 바다의 마력을 그때 전신을 떨며 절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없이 넓은 바다, 깊은 바다, 먼 바다, 영원한 바다, 어쩌면 신의 모상일 것도 같은 바다.
내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바람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한 겹 입혀져서 꿈속처럼 아득한 그 수평선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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