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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갈잎 / 이영희

부흐고비 2020. 2. 29. 11:28

갈잎 / 이영희


누런 낙엽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등성이와 골짜기, 언덕 저 멀리까지. 비탈 아래 있는 작은 산막의 지붕도 분간할 수 없다. 두어 달 전만 해도 울창하던 숲이었건만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멀건 하늘에 아상한 가지를 벋고 있는 나무들의 키가 유난히 길어 보인다.

그런데 짙은 회색의 이 나무들은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이 온통 갈라져 있다. 낙엽 또한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갈잎뿐이다. 아마 이 산은 오랜 옛날부터 도토리 상수리가 떨어져서 절로 돋아나 자란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모두가 참나무 족속인 모양이다.

바람 한 점 없는 하오, 갈잎을 보며 갈잎을 밟으며 참나무들 사이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긴 햇살이 살그머니 비추는 곳도 있다. 갈잎들은 눈을 가늘게 하고 조용히 미소하는 것 같다. 어제 이른 아침에는 이슬에 녹녹한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는데.

갈잎들은 지난여름 나무에 매달려 계속된 태풍의 그 많은 거센 비바람의 휘둘림으로부터 이제야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이 산에 막 들어설 때의 스산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차분하고 편안해진다. 어쩐지 모르게 끼어들어 있던 번거롭고 어지러운 그 세계에서 벗어나 조용한 내 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다.

갈잎들은 책갈피에 넣었던 것처럼 납작한 것은 없다. 대롱처럼 말린 것도 있지만 거의가 가슴을 오긋이 오므리거나 허리를 굽히고 서로 몸을 의지하고 있다. 갈잎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란 곰실곰실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자코 내려다본다. 그들은 가만가만 소곤거리고 있는 것 같다. 갓난아기처럼 곰지락거리며 옹알옹알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한참이나 이렇게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갈잎들이 한 잎 한 잎 모두 방글거리는 어린 애기의 얼굴인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밖에서 돌아오는 나에게 어서 오라며 꼭 어린아이와 같이 웃으시던 아흔 아홉이나 되신 우리 할머니의 얼굴인 것도 같고…….

어떤 이에게는 낙엽이란 늙고 병들어 버림받은 것이다. 혹은 꿈의 껍질이다 하며 슬퍼한다. 하기야 길 위에 떨어져 밟히기도 하고 구르다 미끄러지다 어디론지 날아가버리던 낙엽, 아직 푸르건만 벌레에 먹혀 그물처럼 잎맥만 남은 채 나무 아래 누워 비를 맞고 있는 낙엽, 그런 것을 보면서는 나도 슬펐다.

하지만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수북이 쌓여 있는 노랑 은행잎, 이파리마다 윤이 나며 여러 가지 색으로 예쁘게 물들어 잔뜩 떨어져 있는 감잎, 자주나 주홍 등으로 물든 단풍나무 아래 쏟아져 있는 단풍잎, 이런 것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신비스럽고 또 아름답던가.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그와 같이 채색이 되어온다. 조용히 접었던 날개가 어디로 날자는 것인지 다시금 펄럭이며 설레어온다. 그러나 지금 여기 온 산을 덮고 조용히 있는 모양도 없고 색깔 또한 누렇기만 한 갈잎들은 바라볼수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고단한 긴 여행으로부터 허물없고 편안한 내 본래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서 있자니 다리며 발가락이 옴질거려진다. 어릴 때 짚 덤불속에 파묻히듯 갈잎들 사이로 끼어들고 싶은 것이다. 아기가 되어 방글거리는 아기들과 아기처럼 웃으시는 아기 같은 할머니와 얼굴을 부비며 함께 키득거리고 싶은 것이다.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물고 부지런히 갈잎 속으로 숨는다. 멧새 한 마리가 이쪽저쪽 나지막한 나뭇가지로 날며 갈잎들을 들여다본다. 아마 오늘 밤 잠자리를 찾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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