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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번민과 고통 / 한용운

부흐고비 2020. 5. 2. 09:59

번민과 고통 / 한용운1


번민과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 정신 활동으로 번민을 제하자.

먼저 고통과 번민에 대한 관념부터 말씀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받는 고통으로 말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째 정신상으로 받는 고통과, 둘째 물질상으로 받는 고통입니다.

모든 고통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니, 이것을 받은 때에 받아서 느낀 때에 비로소 고통이 생기는 것이외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는 그 느낌이 고통이외다. 들어오는 고통을 받지 말고, 스스로 나아가 기쁘게 즐겁게 영적 활동으로 나아가면 고통이란 없을 것이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현실 세계를 부인한 모순의 말이라 할 것이외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밖으로 들어오는 고통 그것은 다름없이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외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넓어집니다. 허나 이것이 결코 현실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외다. 다만, 그 고통이 생기는 까닭이 고통을 느끼는 데 있으므로, 만일 이 고통을 느끼면서 밖으로 그 고통 주는 바를 쳐 버린다든지, 또는 그 고통을 없이할 만족을 요구한다든지 할진대, 아마 그 고통은 용이하게 없어지지 아니하리다. 더욱 고통은 고통을 더할 것이외다. 옷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밥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자유를 잃어서 고통이라 합니다. 그래서, 밥을 구하며 옷을 주기를 기다립니다. 자유를 빼앗은 자를 원망합니다. 고통이 주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도 하고, 애원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주는 고통 그것이 또한 피(저)라는 자리에 있어서 아(나)에게 요구합니다. 나와 같이 겨룹니다. 이렇게 되고도 고통이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고도 번민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우리 조선 사람이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무한한 고통을 받음은 사실이외다. 남다른 설음과 남다른 고통으로 울고불고하는 터외다. 밥이 넉넉지 못하고, 옷을 헐벗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갖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자유가 없으니까, 눈이 있으나, 입이 있으나 없으나 다름이 없습니다. 손이 날래고 발이 튼튼하다 하더라도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어 갑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물리치려고 없이하려는 태도로 수단을 부리고 길을 취한다 하면, 고통은 점점 더할 것이외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의 탈 가운데서 뛰어나와 쾌락하게 평화로운 영적 활동을 계속하여 가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외다. 고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외다.

  1. 한용운(1879~1944). 시인. 승려. 법호는 만해. 충남 홍성 출생. 한학 수학. 33인 중의 하나인 그는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 예술적, 사상적 깊이가 있는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고 18세 때는 동학에 참여하였고 그 후 승려로 한국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고 만주에 건너가 독립 운동에 공헌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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