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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구더기는 똥을, 말똥구리는 말똥을, 낙타는 소금을, 생쥐는 측간을, 닭은 지네를, 고양이는 뱀을, 뱀은 파리를, 좀벌레는 책을 좋아한다. 이 모든 것이 본성이다. 저 여러 사물들에게는 응당 자연스레 생긴 취미가 있어 각자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이르게 된다. 사물의 본성은 본래 옅은데 기욕(嗜欲)이 그것을 짙게 만드니, 나 또한 시(詩)에 있어서 그러하다. 나는 일여덟 때부터 시를 배웠는데 오래도록 빠져들어 미친 듯 좋아하여 밤낮을 잊고 침식을 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른들은 병이라도 날까 걱정하여 금지시켰지만 번번이 틈을 타 인적 드문 곳에 숨어 몰래 읊조렸다. 걱정이라고는 오직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일 뿐, 무엇이 즐거워서 그렇게까지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원문

蝍蛆嗜糞, 蛣蜣嗜馬通, 橐駝嗜鹽, 鼷鼠嗜仄, 鷄嗜蜈蚣, 猫嗜蛇, 蛇虎嗜蠅, 蠹魚嗜書. 皆性之也. 彼數物者應有自然之味, 使各自不期而致也. 物性本淡, 嗜欲濃之, 亦猶余之於詩也. 始余七八歲時, 學作韻語, 久而沈淫狂喜, 至於亡晝夜廢寢食. 長者憂其疾而禁之, 則輒乘間屛處潛自咿哢. 惟恐或後, 不知何所樂而然矣.

- 조수삼(趙秀三, 1762~1849), 『경원총집(經畹總集)』 「서문(序文)」.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해설

올해 팔순인 모친께서는 두 가지 취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불경(佛經) 읽기와 베껴 쓰기이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절에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때마다 다녀올 만큼 독실한 불자이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취미인 것도 같다. 그런데 이 독실한 신앙도 제쳐놓을 만큼 중요한 취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WWE라고 불리는 미국 프로레슬링 프로그램 시청이다. TV에서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읽고 있던 불경과 베껴 쓰던 사경(寫經) 노트도 거실 한 구석으로 슬며시 치워두고 레슬링 시청에 몰두한다.

모친에게 레슬링 시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만 더 설명하도록 하자. 우선 등장인물이다. 선수 이름을 본인 방식으로 바꿔 부른다는 단점(예를 들면 ‘존 시나(John Cena)’라는 선수를 ‘쪼신’으로 호칭)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에 달하는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선수들의 약사(略史)를 기가 막히게 줄줄 꿰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선역(善役)이고 누가 악역(惡役)인지, 선수들 사이의 역대 전적(戰績)과 갈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모두 알고 있다. 게다가 어떤 채널에서 언제 시작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런 덕택에 언제부터인가 집안 행사로 인해 본가에 모이는 날은 온 가족이 여지없이 프로레슬링을 강제 시청하게 되어버렸다. “어머니, 저거 다 쇼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가도 실감나는 리액션과 함께 레슬링 시청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마 그러질 못한다. 어떤 때는 모친에게 별다른 즐거움을 드리지 못하는 필자보다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이 더 큰 효도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모친께서 언제 어떤 연유로 프로레슬링에 푹 빠지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어찌되었든 현재로서는 여든 노모에게 불경 읽기와 함께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취미임이 분명하다.

기왕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든 김에 한 가지 사례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몇 해 전 <서울시민대학>에서 교양 강좌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매주 한 차례씩 총 10회를 진행하는 연속 강좌였는데 어떤 어르신이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강의를 경청해주셨다. 부족한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는 수강생만큼 반가운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고마운 마음으로 쉬는 시간에 이것저것 여쭤보다가 더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들게 되었다. 어르신 연세가 아흔셋이며, 잠실에서부터 강연장까지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오신다고 하였다. 굳이 뭐 이렇게 힘들게 강의를 들으시냐는 필자의 질문은 어르신의 대답 앞에 그저 그런 우문(愚問)이 되어버렸다. “저는 이런 교양 강좌 듣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져요.” 이 어르신이 대중 강좌로 만났던 수강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조선후기의 가장 중요한 중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되는 조수삼(趙秀三)의 글이다. 그는 32세가 되어 그간 써둔 시편을 정리하고 위와 같이 서문을 붙였다. 만물은 본디 좋아하는 것을 따른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자신이 시문을 짓는 행위 또한 다름 아닌 본성을 따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글을 짓는다는 행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본성을 드러내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아니다. 서문의 뒷부분에서 조수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따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만 그것(시문)을 즐겨 적취[癖]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데 부지런했고, 그것을 구하는 데 부지런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 많았다.(顧其嗜之也癖, 故求之也勤, 求之也勤, 故得之也多.)

독경과 사경이든, 프로레슬링 시청이든, 교양 강좌 수강이든, 시문을 짓는 일이든,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어쩌면 조수삼의 말처럼 ‘무엇이 즐거워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지 못하는(不知何所樂而然矣)’ 경지에 올랐다는 점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체로 돈이나 명예가 사람을 움직이게끔 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큼 사람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한다. 그 즐거움 덕분에 그 어떤 불편함이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부지런해지고, 부지런해지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성과가 크든 적든, 남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닌 듯하다. 내가 즐겁고 내가 행복하다면.

글쓴이 : 백진우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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