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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욕망의 순서 / 최민자

부흐고비 2020. 10. 8. 13:52

아기가 뒤집기를 시작했다. 생후 4개월 어린것도 제 고집이 있는지 한사코 왼쪽으로만 뒤집으려 한다. 끙끙거리다 성공하니 제 성취에 양양해져 낯빛이 금세 해사해진다. 풍뎅이처럼 아등바등, 땅 짚고 헤엄치기를 연습하다가 두 손 두 발 치켜들고 이륙 연습도 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순서를 밟는 것, 생각할수록 신통방통이다.

저만치 놓여 있는 삑삑이 장난감에 닿지 못한 아기가 성질을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린다. 흔들거리는 모빌이나 바라보던 아이 안에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손안에 넣고 싶은, 욕망이란 게 생기기 시작한 거다. 프로이트 심리 발달 단계로 보면 아이는 지금 구강기에 있다. 주먹을 빨고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입에 닿는 모든 걸 빨고 싶어 한다. 욕구와 표현이 입에 집중되어 배고프면 울고 편안하며 벙실댄다. 기분이 좋으면 옹알이도 한다. 손 내밀어 장난감을 집어 들진 못해도 소리 나는 장난감을 흔들어주면 눈망울에 반짝, 환한 불이 켜진다.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깨우쳐가는 발달 과정을 목도할 때마다 아이의 몸 안에 작은 신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혹, 그 작은 신의 이름이 본능이려나. 아기를 안아올려 삑삑이를 쥐어준다. 냉큼 입술을 들이대더니 말간 혀를 내밀어 조심스럽게 감식한다. 빨다가 잠시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입으로 데려가 빤다. 아이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눈으로 바라보고 손으로 감촉하고 입술로 확인한 다음에야 욕망하는 대상을 몸 안으로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를 소유하는 과정은 연인들의 사랑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첫눈에 반하지 않을지라도, 사랑은 일단 눈에서 시작된다. 눈이 먼저 클릭을 해야 마음이 쏠려 호기심이 생겨난다. 호기심이 궁금증으로 증폭되면서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손으로 가만히 내밀어질 것이다. 무르익은 욕망이 입술로 혀로 옮겨지는 동안 머릿속에선 빠르게 손익계산도 할 터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직행시키는 이 궁극의 미각을 이 사람과 오래 공유해도 좋을까, 내 안으로 뜨겁게 모셔 들여도 괜찮을까.

생명체가 육신이라는 하드웨어를 뒤집어쓴 DNA 데이터베이스의 플랫폼이라면 유전자를 운반하고 전송하라는 운용체제의 명령어들을 자동실행 시키는 프로세서가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일 것이다. 하니 1+1=1이라는 궁극의 셈법으로 출시된 신제품이 욕망에서 소유까지의 절차와 과정, 소프트웨어 전면의 데모 버전을 미리 한번 플레이 해보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아닐까. 개발이 완료되기 전에 시연해보는 맛보기 프로그램이 데모 버전일 테니.

태어나 몇 달 안에 답습해버린 과정을 실전에서 되풀이하며 아이는 당차게 세상을 밀고 나갈 것이다. 세상을 내 안으로, 나를 세상 속으로, 온갖 매혹적인 것들을 욕망하고 소유하며 사람 사이를 분주히 누빌 것이다. 꿈꾸고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 안개와 이슬, 무지개나 그림자일 뿐일지라도. 그런데 혹, 어쩌면 이승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생의 데모 버전 아닐까. 장자의 나비처럼 우리 모두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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