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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닐우산 / 정진권

부흐고비 2020. 10. 15. 11:29

언제 어디서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에도 헌 비닐우산이 서너 개나 된다. 아마도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서 내가 사 들고 온 것들일 게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나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래도 버리긴 아깝다.

비닐우산은 참 볼품없는 우산이다. 눈만 흘겨도 금방 부러져 나갈 듯한 살하며, 당장이라도 팔랑거리면서 살을 떠날 듯한 비닐 덮개하며,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그러나 그런대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우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날 때, 가난한 주머니로 손쉽게 사 쓸 수 있는 우산은 이것밖에 없다. 물건에 비해서 값이 싼지 비싼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一金 一百원也로 비를 안 맞을 수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비닐우산의 덕이 아니겠는가?

값이 이렇기 때문에 어디다 놓고 와도 섭섭하지 않은 것이 또한 이 비닐우산이다. 가령 우리가 퇴근길에 들른 대폿집에다 베우산을 놓고 나왔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우리의 대부분은 버스를 돌려 타고 그리로 뛰어갈 것이다. 그것은 물론 오래 손때 묻어 정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백 원짜리라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가高價의 베우산을 받고 나온 날은 어디다 그 우산을 놓고 올까 봐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썩인 머리로 대포 한잔 하는 자리에서까지 우산간수 때문에 걱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버리고 와도 께름할 게 없는 비닐우산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비닐우산을 받고 위를 쳐다보면, 우산 위에 떨어져 흐르는 물방울이 보인다.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내는 그 통랑한 음향도 들을 만한 것이다. 투명한 비닐 덮개 위로 흐르는 물방울의 그 청랑晴朗함, 묘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빗소리의 그 상쾌爽快함, 단돈 백 원으로 사기에는 너무 미안한 예술藝術이다.

바람이 좀 세게 불면 비닐우산이 홀딱 뒤집혀지기도 한다. 그것을 바로잡는 한동안, 비록 옷은 다소의 비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즐거운 짜증을 체험할 수 있고, 또 행인行人들에게 가벼우나마 한때의 밝은 미소微笑를 선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날이 그날인 듯, 개미 쳇바퀴 돌 듯하는 우리의 무미無味한 생활 속에, 그것은 마치 반半박자짜리 쉼표처럼 싱그러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좀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퇴근을 하려고 일어서다 보니, 부슬부슬 창밖에 비가 내린다. 나는 캐비닛 뒤에 두었던 헌 비닐우산을 펴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살이 한 개 부러져 있었다. 비가 갑자기 세차졌다. 머리는 어떻게 가렸지만, 옷은 다 젖다시피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책가방을 든 어린 소녀少女였다. 젖은 이마에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나 하나의 머리도 가리기 어려운 곳을 예고도 없이 뛰어든 그 귀여운 침범자는 다만 미소微笑로써 양해를 구할 뿐 말이 없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소까지 함께 걸었다.

옷은 젖지만, 그래도 우산을 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마침내 소녀少女의 버스가 왔다. 미소微笑와 목례目禮를 함께 보내고 그는 떠났다. 이상한 공허감空虛感이 비닐우산 속에 남았다. 그것도 百 원으로 살 수 없는 체험일 것이다. 나도 곧 버스를 탔다. 차가 M 정류장에 설 때였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는데, 정류소엔 우산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딸들, 오빠나 누나를 기다리는 오누이들, 남편을 마중나온 아낙네들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용하게도 그를 맞으러 나온 우산을 찾아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때 나는 차창 밖으로 한 젊은 여인女人을 보았다. 그녀는 비닐우산을 받쳐 들고 버스 안을 살피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신혼新婚의 여인女人이었을까?

버스는 또 떠났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번이나 버스를 그냥 보냈을까? 말없이 떠나는 버스를 조금은 섭섭하게 바라볼 그녀의 고운 눈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 버스에선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꼭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용하게 알아보고는 그녀의 비닐우산 속으로 성큼 뛰어들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원망의 눈길과 미안해하는 은근한 미소微笑, 찬비에 두 온 몸이 다 젖는대도 그 사랑은 식지 않을것이다. 비닐우산은 참 볼품없는 우산이다. 한 군데도 탄탄한 데가 없다. 그러나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효용성이 있음으로 하여 두고두고 보고 싶은 우산이다. 그리고 값싼 인생人生을 살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넘어질 듯한 부실不實한 사람, 그런 몸으로나마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는 찬비를 가려 주려고 버둥대는 삶, 비닐우산은 어쩌면 나와 비슷한 데도 적지 않은 것 같아서, 때때로 혼자 받고 비 오는 길을 쓸쓸히 걷는 우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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