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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도바람꽃 / 변해명

부흐고비 2021. 2. 2. 11:23

봄을 시작으로 산야에는 참으로 많은 풀꽃들이 피어난다. 노란 꽃다지에서 시작하여 보랏빛 제비꽃, 흑장미 빛의 할미꽃, 꽃분홍이란 말보다 연산홍 꽃빛이 더 어울리는 패랭이꽃, 진달래꽃 빛의 앵초꽃, 연분홍과 흰색이 어우러진 밥풀꽃, 금낭화, 노란 산괴불주머니꽃, 짙은 보라의 붓꽃, 황금빛 원추리꽃, 하얀 방울 같은 둥굴레꽃, 분홍과 보라가 어우러진 엉겅퀴꽃 등 참으로 다양한 빛깔에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 나는 그런 꽃들이 피어나는 수채화 빛 산야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제비꽃을 보면 그 곁에 주저앉아 앙증맞은 꽃으로 반지를 해 끼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제비꽃이 가득한 풀밭에 앉아 제비꽃 반지를 만들었다. 꽃대공을 뽑아 올려 꽃잎 밑부분에 주머니같이 붙어 있는 부분을 조금 자르고 꽃줄기를 끼우면 꽃을 단 반지가 되었다. 열 손가락에 제비꽃 반지를 끼고 공중에서 반짝반짝 손을 돌리면 공주가 된 기분으로 하늘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또 무덤 가에는 할미꽃이 많았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보며 피어 있는 할미꽃이 불쌍해서 가끔은 꽃줄기를 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봐. 할머니도 가끔은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는데” 하면서 꽃 허리를 세워 할미꽃이 하늘을 보게 해보기도 했었다. 외할머니 무덤 가에 피어나던 할미꽃은 할머니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할미꽃을 통해 잠들어 계신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해소가 심했던 할머니의 기침 소리를 들어보려고 무덤에 귀를 대어 보기도 했었다.

나물을 뜯으러 산에 오르면 산기슭에 밥풀꽃이 피어 있었다. 그 곁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으면 숲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아홉이나 넘는 동생들을 두고 의붓 어미 시샘에 굶어 죽은 누이의 혼이 소쩍새가 되기도 했고, 밥풀꽃이 되기도 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저려오던 때도 있었다. 밥풀꽃은 담홍색의 아름다운 꽃이 꽃차례로 꽃을 피우며 오르는데 꽃 속에 하얀 꽃잎 두 개가 길쭉하게 내려와 밥알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집 마당에서 피어나는 금낭화를 보면 산골의 밥풀꽃이 생각난다.

또 잡초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패랭이와 각시붓꽃은 아기자기한 꿈을 꾸게 했다. 붓꽃의 쪽빛 치마와 패랭이꽃의 꽃분홍 저고리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붓꽃 봉오리같이 예쁜 붓으로 글을 쓰는 내 모습을 꿈꿔 보면서 해질녘까지 패랭이, 붓꽃 다발을 들고 산야를 쏘다니기도 했었다.

무리지어 피어도 흔한 느낌이 들지 않고, 한 자리에 어울려 피어도 저마다 다른 꽃들이 흉내낼 수 없는 개성적인 빛과 모양과 향기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 언제나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풀꽃들.

지금도 봄이면 그런 산골 들판의 꽃들이 그리워진다. 꽃이 그리우면 꽃 이름을 외운다. 꽃이름을 외우고 있으면 풀꽃들이 기억 속의 꽃밭에서 고개를 내민다.

꽃보다 이름이 더 아름다운 ‘너도바람꽃’과 ‘나도바람꽃’이 있다. 미나리아재비과의 꽃으로 산 그늘에서 피어나는 꽃인데, 세상에 형태조차 없는 바람을 닮겠다고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이다. 이 꽃이름을 떠올리면 감동적인 시를 읽을 때처럼 여운이 남는다.

우리는 저마다 선망의 대상을 마음 속에 지니고 닮고 싶어한다. 요즘 세상에 많은 여인들이 양귀비 같은 미인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모습은 버리고 공식에 맞춘 복제품의 얼굴을 만들어 자칭 ‘나도 양귀비’ 하며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리라.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바라는, 그래서 자신이 그와 동일하다는 느낌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 꽃들도 서로 비슷하게 닮았다고, 밤나무를 닮으면 ‘너도밤나무’, ‘대송이풀’, ‘구름송이풀’을 닮았다고 ‘나도송이풀’ 하고 붙여졌나 보다. 그런데 꽃이면서 꽃이 아닌 바람을 닮겠다고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이라고 불리어지기를 바라는 꽃이 있다니.

꽃이 아름답다고 함은 열흘 붉은 꽃이 없어 그 단명함에 있다고 하는데, 꽃보다 생명이 더 짧은 바람으로, 순간에 스치는 무형의 존재로 서보려는 꽃의 의지는 이미 꽃이 아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청춘이 아름다움도 그 시간을 지나쳐간 사람에게는 한낮 스쳐간 바람에 불과한 것을. 모든 것은 순간조차 향유할 수 없는 바람 같은 것, 그래서 ‘나도바람꽃’은 그런 순간을 영원으로 인식하려는 꿈을 피워내고 싶은 꽃이 지닌 이름인지 모른다.

나는 이 봄, 산야에 피어나는 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꽃들 속에 서서 나도 한 포기 풀꽃이 되어 본다. 어떤 꽃이 되어 볼까?

‘나도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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